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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이광수][춘원][이광수][친일파][춘원이광수의친일행각]춘원 이광수의 연보, 춘원 이광수의 기본적 사상, 춘원 이광수의 일제파시즘 협력 배경, 춘원 이광수의 친일의식의 단초, 춘원 이광수의 친일행각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춘원 이광수의 연보

Ⅲ. 춘원 이광수의 기본적 사상
1. 계몽사상(啓蒙思想)
2. 민족주의(民族主義)
3. 기독교(基督敎) 사상과 톨스토이 주의
4. 불교(佛敎)사상

Ⅳ. 춘원 이광수의 일제파시즘 협력 배경
1. 1910년대 이광수의 `개인주의`론
2. 1920년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3. 1930년대 이광수의 집단주의론

Ⅴ. 춘원 이광수의 친일의식의 단초

Ⅵ. 춘원 이광수의 친일행각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룰 수 있는 이념체계인 민족개량주의와 문화주의의 실현을 주장하던 때이며, 이어 제3단계는 1939년 이후로 이 때는 전시협력체제로 흔히들 친일이라고 하면 이 시기에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으나 오히려 그 앞 시기가 더 중요한 역사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9년같은 해 10월 29일 부민관에서 열린 총독부 지시의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은 박영희가 사회를 맡았는데 이광수가 회장으로 추대되어 만세삼창을 불렀다. 그러나 동우회사건이 재판에 계류중이었던 그는 판사로부터 회장사임 압력을 받아 12월에 그 직책에서 물러났다. 물론 이내 발표된 창씨개명령(1940. 2. 11부터 접수)에 따라 그는 발빠르게 고야마 미타로(香山光郞)로 이름을 바꾸고 그 자초지종을 이렇게 고백한다. \'지금부터 2600년 전 신무(神武)천황께옵서 어즉위(御卽位)\'를 한 고큐산(香久山)에서 향산을 따오고, \'광수\'에서 \'광\'자는 그대로 쓰면서 \'수\'자는 일본 이름식으로 \'랑\'으로 바꿨다는 이 기발한 이름 풀이는 [지도적 제씨의 고심담], [창씨와 나] 등에서 춘원 자신이 남긴 것들이다. 이 글은 장황하지만 인용해 볼 필요가 있다.
창씨의 동기 “내가 향산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광랑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좀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정치적 영향 “금년 8월 10일까지 조선인의 창씨의 기한이 끝난다. 그날의 결과는 정치적 영향에 큰 관계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즉, 일본식 씨를 조선인 전부가 달았다고 하면 그것은 조선 2400만이 진실로 황민화할 각오에 철저하였다는 중대한 추리자료가 될 것이다. 만일 그에 반하여 일본식 씨를 창설한 자가 소수에 불과하면 그것은 불행한 편의 추리자료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가 조선인을 신임하고 아니함이 조선 자신의 행·불행에 크게 관계가 있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적인 씨를 창설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운동이라고 나는 믿는다.([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 2. 20)”
이후 고야마는 [의무교육과 우리 각오]를 비롯한 많은 논설과 [조선의학도여] 등의 시, [그들의 사랑] 등의 소설, [성전 3주년] 등의 수필, [반도민중의 애국운동] 등의 평론, [지원병 훈련소] 등의 방문기 등 글로 된 모든 장르를 동원하여 왕성하게 일제를 찬양한다.
Ⅵ. 춘원 이광수의 친일행각
1939년 가야마 미쓰로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2차 대전 말기 일제의 국민총동원 계획에 참여하여 1943년 12월 일본 유학생의 학병지원 권고강연에 나섰다. 또 조선 문인협회 회장과 내선일체의 실천을 위하여 일본정신을 깨닫고 황도를 따르자는 황도학회 발기인 대표를 비롯,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대동아문학자대회, 조선문인보국회, 대화동맹, 조선언론보국회, 대의당 등 온갖 친일단체에 참여해 황국 신민화, 징용, 학병 ,정신대 권고문 등의 많은 글을 썼다. 독립 운동가를 숙청하라는 건의와 중등 이상 교육을 받은 조선인 가운데 중국과 시베리아 등지의 2천여 유랑자들이 지닌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해방 수 빈민특위에 기소 당하여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이광수가 쓴 「민족개조론」-
①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이 없게
② 공상과 공론은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 의무라고 생각하는 바를 부지런히 실행하게.
③ 표리부동과 반복함이 없이 의리와 허락을 철석같이 지키는 충성되는 신의 있는 자가 되게.
④ 고식, 준순 등의 겁나를 버리고 옳은 일, 작정한 일이거든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나가는 자가 되게.
⑤ 개인보다 단체를, 즉 사보다 공을 중히 여겨, 사회에 대한 봉사를 생명으로 알게.
⑥ 보통 상식을 가지고 일종 이하의 전문 학술이나 기예를 배워 반드시 일종 이상의 직업을 가지게.
⑦ 근검저축을 상(尙)하여 생활의 경제적 독립을 가지게.
⑧ 가옥, 의식, 도로 등의 청결 등 위생의 법칙에 합치하는 생활과 일정한 운동으로 체격을 소유한 자가 되게,
함이니 이것을 다시 줄여 말하면 덕·체·지의 3육과 부의 축적, 사회봉사, 심의함양이라 할 수 있다. 조선 민족 중에 이러한 사람이 많게 하여 마침내는 조선 민족으로 하여금 참되고, 부지런하고, 신의 있고, 용기 있고, 사회적 단결력 있고, 평균하게 부유한 민족이 되게 하자 함이다.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은 우리 민족을 개량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내용 면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민족 개조론은 민족은 열등함을 드러내고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Ⅶ. 결론
춘원(春園)이광수처럼 우리 문학사에서 치명적이도록 명성과 비난의 명암이 갈리는 작가가 또 있을까? 그리고 신소설에서 근대소설로의 전환기에 그처럼 우뚝 선 사람이 또 있을까? 『무정』을 비롯하여 그의 숱한 작품들은 근대적 문체의 확립, 시제·대명사의 활용과 같은 표현방법 등 문학기법의 진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계몽주의를 선도하고 창작을 통하여 관습을 타파하며 비록 초창기이지만 민족의식을 주창하였던 그의 이름은 그 빛나는 집필활동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뇌리 속에 친일이라는 두 글자와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친일의 그림자는 그의 작품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참고문헌
권순종(1985), 이광수의 희곡 규한과 순교자 연구, 영남어문학
김윤식(1999), 이광수와 그의 시대, 솔
구인환(1983), 이광수 소설 연구, 삼영사
송명희(1997), 이광수의 민족주의와 페미니즘, 국학자료원
윤흥로(1992), 이광수 문학과 삶, 천문사
장영우(1999), 이광수의 근대 인식과 민족주의 사상 -<무정>을 중심으로, 동악어문논집 제35집, 동악어문학회
홍혜원(2002), 이광수 소설의 이야기와 담론,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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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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