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왕부지의 생애][왕부지의 업적][왕부지의 사상][왕부지사상의 수용][왕부지와 왕부지사상의 평가]왕부지의 생애, 왕부지의 업적, 왕부지의 사상, 왕부지사상의 수용, 왕부지와 왕부지사상의 평가 분석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왕부지][왕부지의 생애][왕부지의 업적][왕부지의 사상][왕부지사상의 수용][왕부지와 왕부지사상의 평가]왕부지의 생애, 왕부지의 업적, 왕부지의 사상, 왕부지사상의 수용, 왕부지와 왕부지사상의 평가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왕부지의 생애와 업적

Ⅱ. 왕부지의 사상
1. 정통론
2. 인성론
1) 계선성성론
2) 성명일생일성론
3) 불선의 유래
3. 이욕의 관계
4. 도기의 관계
5. 왕부지의 유물론

Ⅲ. 왕부지사상의 수용
1. 청말 호남신사들의 왕부지사상 수용과 현창
2. 혁명 전후기의 왕부지 사상 수용

Ⅳ. 왕부지와 왕부지사상의 평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民의 집합체 인데 삼천년래 독부민적이 국을 목장으로 삼고 민을 축두로 삼았다”고 발간사를 발표하여 전제타도의 지향을 보였다. 장사교는 화이론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는 왕부지의 『독통감론을 내세우며 “왕선산은 망국의 일민이기에 그 말은 모두 망국의 음이고 소설에 망국의 참이 많다”고 했으며, 왕부지에 의해 추이(만주족)의 중국지배가 얼마나 침통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역설하였다. 장사교의 언론할동은 왕부지의 화이분별을 바탕으로 한 종족론이 청말의 혁명사조에 전적으로 수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담사동의 스승이었던 유인희는 1914년(민국3년) 6월에 장사에 있는 사현강사의 옛터에 선산학사를 설립하였다. 유인희는 개강강연에서 학사동인들에게 국체가 바뀌었으나, 도덕이 타락했다고 보고, 인심을 바로 잡으려면 학술을 창명해야 하는데 그 방도가 ‘술이불작’과 ‘온고지신’이므로 이것의 대상으로서 왕부지의 학술 중 예의 측면을 부각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대부’로서의 책무를 다하여 정치적 결집을 이루어 내고 그 활동으로 지방재정을 보완할 것을 제기하였다. 이어 등장한 방탄백은 왕부지사상의 요체는 ‘의리’와 도덕에 있다고 전제하고 사회를 지도하는 모든 일에는 의리와 도덕의 제창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선산학사가 설립된 시기는 원세개의 제제기도가 표면화하고 그에 대한 찬반운동이 무력대결을 포함하여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이었으며, 호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선산학사를 중심으로 모인 호남의 일부 ‘신사층’은 자신들의 계층적 이익에 대한 위기를 전통적 가치체계의 위기와 동일시하고, 사대부의 전통적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성남서원을 개조하여 설립된 다음 1914년에 정식 명칭이 붙은 호남성립제일사범학교에는 양창제라는 교사가 있었다. 그는 일본과 영국에서 10년간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이지만 정주학과 왕부지의 계통을 이은 호상학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그 결과 학생들에게 중국의 전통을 심어줄 수 있었다. 선산학사의 사원이기도 한 양창제의 제자들은 신민학회를 결성하였고, 후에 선산학사를 접수하고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양창제는 1918년 6월 북경대학 교수로 전임된 후에 장사의 제자들에게 ‘신문화운동’의 중심지였던 북경대학과 연결시켜 주었다. 그는 1920년 초 사망하기 직전 동향출신으로 그 당시 북경대학 교수로 있던 장사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민학회의 회원인 ‘모택동과 채화삼은 출중한 인재이므로 잘 지켜봐 달라’는 내용을 전했다. 모택동은 당시 북경대학도서관에서 신문잡지 열람실을 관리하며 도서관 주임직에 있던 이대교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강하게 영향받고 있었고, 신민학회 회원으로서 북경대학에 진학한 나장룡과 더불어 신문화운동을 도모하고 있었다. 양창제의 각별한 배려를 받고 있었던 모택동은 그가 죽자 그의 딸 양개혜와 결혼하고 혁명운동에 더욱 매진했다.
이처럼 모택동은 왕부지를 삼유로의 반열에 놓고 신봉하였던 호상학에 조예가 깊은 양창제와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원조인 이대교로부터 강한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모택동의 사상적 기반은 그를 전통적이면서도 수구적으로 만들지 않았고, 마르크스주의적이면서도 교조주의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모택동이 볼세비키적 노선에 반기를 들고 근거지 중심의 농민혁명에 매진하여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적인 것에 대한 자부심과 중국에 대한 현실인식 능력이 어느 누구보다도 출중했기 때문이다.
청말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호남의 지식인들은 봉건체제의 강화, 양무와 중흥, 변법, 배만혁명을 주장하면서 왕부지의 예의 강조, 이세론, 이기론, 도기론, 화이론 등을 도용했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하고 지역의식을 발양하기 위해서 동향출신이며 학문의 대가인 왕부지의 권위를 빌어온 것에 다름 아니다. 설사 그들이 도용한 부분이 정확하다 해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왕부지의 사상을 이해했는지는 의문시 된다. 평생 연구와 저술에 몰두한 나머지 너무 방대하게 전개된 왕부지사상은 간혹 오류와 어휘의 부적절함이 발견되며, 초기의 저작과 말기의 저작에서 일치되지 않는 내용도 눈에 띈다. 1962년 이후로(72년 제외) 장사에서 10년마다 한 번씩 개최되는 왕부지기념학술대회에서는 매회 그의 사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왕부지의 사상이 중국 철학사에서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라 해도 연구자나 시대의 입장에서 그를 유물론자니 진화적 사회론자니 하며 단정하는 태도는 좀더 오랜 연구 끝에 판단하여야 할 문제이다.
Ⅳ. 왕부지와 왕부지사상의 평가
왕부지는 어디까지나 통치계급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러한 세상의 원활한 운명을 꿈꾼 전형적인 유가의 하나였다. 다만 현상세계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하여 천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기존 유가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인식론적인 전환을 꾀하고, 이를 토대로하여 현실을 개혁하려한 인물일 따름이다.
청말에서 민국초에 이르기까지 호남의 신사들이 왕부지를 존경하고 그의 저술을 탐독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진정 왕부지 사상의 정수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했는지는 의문이다. 호남의 사인계층들이 왕부지를 공부하고 그의 학문적 권위를 빌린 것은 현실을 개혁하려는 강한 욕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왕부지를 바라보고 그의 사상을 도용한 부분이 각 시기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서구열강의 침략이 점점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그들의 우수한 과학기술문명을 도용하려고만 하지 않고, 중국적 전토에서 현실개혁의 이론적 기반을 찾으려 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결국 이러한 노력은 곽숭도, 담사동, 황흥, 모택동으로 이어지면서 옳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참고문헌
○ 김진근(1996), 왕부지의 주역철학, 예문서원
○ 김배철(1987), 청말민국초 호남에서의 왕부지사상-그 수용과 현창, 역사학보
○ 에드가스노우 저, 신홍범 역(1994), 중국의 붉은 별, 두레
○ 이계명(2003), 중국사학강요, 전남대학교 출판부
○ 쟉크제르네 저, 이동윤 역(1989), 동양사통론, 법문사
○ 표정훈(2002), 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 중앙 M&B
○ 하정옥, 중국문학사, 정범진
  • 가격5,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9.04.19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3107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