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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폴 리쾨르 인간관][폴 리쾨르 해석학][폴 리쾨르 역사이야기에 대한 해석학][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폴 리쾨르의 인간관, 폴 리쾨르의 해석학, 폴 리쾨르의 역사이야기에 대한 해석학,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폴 리쾨르의 인간관
1. 인간 주체의 문제
2. 역사관과 해석학적 순환

Ⅲ. 폴 리쾨르의 해석학

Ⅳ. 폴 리쾨르의 역사이야기에 대한 해석학

Ⅴ.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 안에도 혁신과 침전의 운동이 있는데, 이 운동의 작인이 시간과 이야기1이다. 즉 시간(성)은 파열, 분열의 계기이며 이야기1은 조직화, 종합의 계기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행위라는 계열을 따라서 상승운동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쾨르가 말하는 시간과 이야기의 순환이라는 것은 행위 그 자체의 순환적 발전이라고 얘기할 수 있으며, 이는 이야기의 자기 순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우리의 상식적 이해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연속되는 계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공존의 계기이다. 이에 관해서는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분석이 도움이 되겠다. 두 개의 긴 인용은 각각 시간 사유에 있어서 베르그송과 니체가 가져온 혁명적 의의를 서술하는 자리에서 등장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현재\'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우리는, 현재는 다른 현재가 그것을 대체할 때에만 지나갔다(est passe)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해보도록 하자: 만약 옛 현재가 그것이 현재인 동시에 지나가 버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새로운 현재가 나타나겠는가? 만약 현재가 현재인 동시에 지나가 버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어떤 현재이건 지나갔겠는가? 만약 과거가 무엇보다도 그것이 현재였던 것과 동시에 구성되지 않았었다면, 어떠한 과거도 구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시간의 근본적인 지위와 기억의 가장 심오한 역설이 있다: 과거는 그것이었던(a ete) 현재와 동시간적(comtemporain)이다. 만약 과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만약 즉각 그리고 지금 과거가 지나갔던 것이 아니라면, \'과거 일반\'은 존재하는 것이 결코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이 과거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즉각 구성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저편에 있는(ulterieur) 현재에 기반해서는 더더욱 재구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과거가 현재 - 이 현재의 과거가 되는 저 현재- 와 공존하지 않았다면, 그 과거는 구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어지는 두 계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두 계기를 지칭한다; 그 하나가 현재인데 그것은 끊임없이 지나가고, 다른 하나는 과거인데 그것은 끊임없이 존재하며 그것을 통해 모든 현재가 지나간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순수 과거가, 일종의 \'과거 일반\'이 존재한다: 과거는 현재를 뒤따르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그것 없이는 현재가 지나갈 수 없는 순수 조건이라고 상정된다. 바꿔 말해, 각각의 현재는 과거로서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다(chaque present renvoie a soi-meme comme passe).\" - 또, \"어떻게 과거가 시간 중에서 구성될 수 있는가? 어떻게 현재가 지나갈 수 있는가? 지나가는 순간은, 만일 그것이 이미 현재인 동시에 과거가 아니라면 또한 현재인 동시에 미래가 아니라면, 결코 지나갈 수 없을 것이다. 만일 현재가 그 자체로 지나가지 않는다면, 만일 현재가 지나간 것[과거]이 되기 위해 새로운 현재를 기다려야 한다면, 과거라는 것은 결코 시간 중에서 구성되지 않을 것이며, 이 특정한 현재는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기다릴 수 없으며, 순간이 지나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다른 순간들을 위해 지나가기 위해서는) 순간은 현재인 동시에 과거이고 현재인 동시에 미래여야만 한다. 현재는 과거 및 미래로서의 자기 자신과 공존[병존]해야 한다. 한 순간과 다른 순간들과의 관계를 정초하는 것은, 순간이 현재 과거 및 미래로서의 자기 자신과 갖는 종합(적) 관계이다. 따라서 영원 회귀는 [시간의] 지나감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존재하는 무언가의, 하나의 또는 동일한 무언가의 회귀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영원 회귀\'라는 표현에서 동일한 것의 회귀로 여길 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회귀하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회귀 그 자체는 생성과 지나가는 것을 긍정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를 구성한다. 회귀하는 것은 하나(l\'un; hēn, 일자)가 아니며, 회귀 그 자체는 다기함과 다양함을 긍정하는 하나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영원 회귀에서 동일성(identite)은 회귀하는 것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차이를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회귀가 필요하다는 사실(le fait de revenir pour ce qui differe)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영원 회귀는 하나의 종합으로 생각되어야만 한다: 시간과 그것의 차원들의 종합, 다기함과 그것의 재생산의 종합, 생성과 생성을 긍정하는 존재의 종합. . .\"
우선 시간과 이야기의 순환성은 진정한 순환성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시간은 이야기의 옆과 내부에 있기 때문에 순환은 특정한 의미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살폈고, 다음으로 시간성이 영원성과 대비되면서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는 기독교적 편견은 통속적 시간관과 결합되어 시간성의 의미를 폄하시키는데 이는 잘못된 전제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리쾨르의 \'변증법\'적 경도를 지적하고 싶다. 변증법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목적론적-종말론적 사유이다. 변증법 안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결국 무화되는데, 그 이유는 끝(telos, eschatos)에 가면 모든 것이 화해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유일한 끝을 향한다. 그렇기에 - 모든 것은 헛되도다. 그러면서도 변증법적 사제는 그 헛됨, 무상함을 生 속에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일을 하는 일종의 의사를 자처한다. 그 의사는 니체의 지적대로 \"상처에서 오는 고통을 가라앉히면서, 동시에 상처에다 독을 뿌린다.\" 이런 의미에서 리쾨르는 부분적으로 변증법적 사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경동, 현대의 사회학, 박영사, 2006
강영안, 강교수의 철학이야기, 2001
리처드커니, 임현규·곽영아·임찬순 역, 현대유럽철학의 흐름, 한울출판사, 1992
맑스 밀러, 박찬국 역, 실존철학과 형이상학적 위기, 서광사, 1988
안계춘 외, 현대사회학의 이해, 법문사, 2002
칼 야스퍼스, 신옥희 역, 철학적 신앙, 이대출판부, 1990
C. 프리틀라인, 강영계 역, 서양철학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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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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