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남지역의 성곽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진주성
경주읍성
부산진지성서문및성곽우주석 ( 釜山鎭支城西門및城廓隅柱石)
사천읍성
기장죽성리왜성 ( 機張竹城里倭城 )
통영성지 ( 統營城址 )
구영등성 ( 舊永登城 )
기장읍성 ( 機張邑成 )
거열성 ( 居列城 )
장문포왜성 ( 長門逋倭城 )
사천금성리토성지 ( 泗川金成里土城址 )
밀양읍성 ( 密陽邑城 )
합포성지 ( 合浦城止 )
영산읍성지 ( 靈山邑城址 )
동래읍성지 ( 東萊邑城址 )
금정산성 ( 金井山城 )
양산북부동산성 ( 梁山北部洞山城 )
합천백마산성 ( 陜川白馬山城 )
마현산성 ( 馬峴山城 )
전송대산성 ( 傳松臺山城 )
양산우불산성 ( 梁山牛佛山城 )
지세포성 ( 知世浦城 )
함안성점산성 ( 咸安城岾山城 )
함안포덕산성 ( 咸安飽德山城 )
함안문암산성 ( 咸安門巖山城 )
호미산성 ( 虎尾山城 )
천성진성 ( 天城鎭城 )

본문내용

외는 전답이며 성외 역시 전답과 임야로 되어 있다. 조선 인종 때에 남방 침입을 우려하여 영남 6부의 2만 5천명을 동원하여 선창성을 쌓고 그 성아래 진을 두고 수군만호를 두어 진방케 하였다. 그 당시 만호 강지욱(姜志昱)이 임진난이 일어나 일본의 가등청장군과 교전하여 성이 함락되었고 그 후 옥포성 밖으로 갔다가 효종 2년 신묘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 왔다. 성 입구에 수군 만호의 비석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함안성점산성 ( 咸安城岾山城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에 있는 이 산성은 계곡을 둘러싸며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일정하지 않은 모양으로 쌓은 산성이다. 성의 둘레가 약 1.7㎞에 달하는 대규모의 산성이고, 남서쪽 성벽은 바깥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쌓았다. 만든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이나 유물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만든 방식이 근처의 성산산성, 문안산성과 동일하다. 그리고 성 안에서 발견되는 일부 토기와 기와조각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것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산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부정형(不定形)으로 남서쪽과 북서쪽은 9부 능선에 축조되어 있고 북·동쪽은 5부능선에 남동쪽은 5∼6부 능선에 축조되어 있는, 성의 둘레가 약1.7㎞에 달하는 대규모 포곡식 산성(包谷式 山城)이고 남서쪽의 성벽은 내탁식방식(內托式方式)으로 축조되어 있다. 이 성의 축조 연대를 가늠할만한 기록이나 유물의 채집은 이루어져 있지 않으나 다만 성의 축조 방식이 성산산성(城山山城) 문암산성(門巖山城) 등과 동일하며 성안에서 채집되는 일부 토기와 기와편 등으로 미루어보아 이 성은 통일신라시대(8세기경)까지는 거슬러 올라갈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함안포덕산성 ( 咸安飽德山城 )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는 포덕산성은 산이면과 칠원면 마산시 내서읍에 걸쳐 산 정상을 둘러싸며 만들었다. 성의 둘레는 480m 에 이르는데 동벽 190m, 서벽 180m, 남벽 50m, 북벽 60m 이며 성폭 5m, 외벽 높이 5∼6m 정도로 전체적인 윤곽이 뚜렷하다. 남동벽과 북벽을 흙으로 쌓았다고 착각하기 쉬우나 군데군데 남아 있는 돌로 쌓은 흔적과 흩어져 있는 돌 등으로 미루어 완전하게 흙으로 쌓은 것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포덕산성은 함안군 산인면 신산리와 칠원면 유원리 달전동, 마산시 내서읍 호계리에 걸쳐 있으며 산성의 지세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으며 쌓여진 산성도 동쪽보다 서쪽이 높은 8∼9부 능선위에 설치된 퇴뫼식(산정식(山頂式)) 산성으로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다. 성의 둘레 480m 가운데 동성벽 190m 서성벽 180m 남성벽 50m 북성벽 60m 성폭 5m 외벽높이 5∼6m 안팎으로 전체적인 윤곽이 뚜렷하다. 얼핏보아 남동벽, 북성벽을 토성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군데군데 남아 있는 기저부(基底部)와 중상부까지의 석성흔적과 흩어져 있는 성석 등으로 미루어 완전한 토성이 아님을 짐작케한다.
함안문암산성 ( 咸安門巖山城 )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는 이 산성은 해발 197m의 자구산 장원봉과 북서쪽으로 이어진 해발 167m의 산 정상에 각각 남아 있는데, 문암 큰 성과 작은 성으로 부른다. 전체 둘레는 1100m 이고 동남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성 폭은 대개 3m 정도로 추정한다. 큰 성은 장원봉의 8부능선 부분에 거의 둥근모양의 타원형으로 돌아가며 쌓았고, 성벽은 바깥을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밋밋하게 만들었다. 산성은 해발 197m의 자구산(紫丘山)의 지붕(支峰)인 장원봉(壯元峰)과 북서쪽으로 연이어진 해발 167m의 산정(山頂)에 각각 잔존해 있는데 이를 편의상 문암 큰성과 문암 작은성으로 부른다. 먼저 주성(主城)으로 보이는 큰성은 장원봉의 8부 능선상에 거의 둥근 모양의 타원형으로 돌아가며 성벽은 내탁식(內托式)의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둘레는 1,100m이고 동남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성폭은 대개 3m 정도로 추정되고 회곽도의 폭은 10m가 넘는곳도 있으며 외벽의 경사도는 60˚∼80°이내로 되어 있다.
호미산성 ( 虎尾山城 )
의령군 정곡면 죽전리에 있는 호미산의 정상부에 약 200m 가량의 흙으로 쌓아 올린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을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의령읍 하리 벽화산에 있는 벽화산성(碧華山城)과 비슷한 시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망우당 곽재우(1552∼1617) 장군의 전적지 가운데 하나이며, 호미산은 산의 형태가 호랑이 꼬리를 닮았다 해서 얻은 이름이다. 호미산성(虎尾山城)의 정상부에 약 200m가량 토성의 축조(築造)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紅衣將軍) 전적지 가운데 하나이며 호미산성은 산의 형태가 호랑이 꼬리를 닮았다 해서 호미산성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천성진성 ( 天城鎭城 )
쓰시마섬(對馬島)에서 부산(釜山)·진해(鎭海) 쪽으로 진입하는 바닷길의 요충(要衝)에 있어서 예로부터 왜구(倭寇)가 침입하는 길목이었다. 조선(朝鮮) 중종(中宗) 5년(1510)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이곳에 진영(鎭營)을 베풀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자는 논의가 있게 되었고, 중종 39년(1544)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이 일어나자 방어의 필요성이 더욱 크게 인식되었다. 이때 바다쪽으로 돌덩이를 채워서 병선(兵船)을 보호하는 시설과 함께 진보(鎭堡)를 축조하여 수군(水軍)이 주둔(駐屯)하게 하였다. 이웃한 가덕진(加德鎭) 소속으로, 함께 왜구침입을 막는 곳이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군(倭軍)에게 함락당하였다가 후에 복구되었다. 조선(朝鮮) 중기(中期) 진보(鎭堡) 축성양식(築城樣式)을 보여주는 성벽은 둘레 약 960m이고 폭 4.5m, 높이 3.5m쯤이다. 서·남·북쪽에는 옹성(甕城)을 갖춘 문이 있고 동쪽에는 문은 없이 성벽을 이중으로 돌렸다. 또 문의 좌우와 성벽이 꺾인 지점에는 성벽 바깥으로 네모꼴의 치성(雉城)을 두어 방어력(防禦力)을 높이었고, 성벽 외곽으로 해자(垓字)를 둘렀던 흔적이 있어서 축성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9.04.21
  • 저작시기2006.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3145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