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임진왜란 외교, 병자호란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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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임진왜란 외교, 병자호란 외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조선초기의 외교

2.임진왜란 외교
1)임진왜란과 조선-명, 조선-후금 관계
2)임진왜란과 조선 - 일본관계

3.병자호란 외교

본문내용

시고 청담(淸談)이나 좋아하던 풍습을 일삼으니, 이런 무리들을 비록 높은 작질로 올려주더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노성한 사람은 자신의 근력이 감당할 수 있는 데까지는 그래도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니, 내가 이 때문에 노성한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는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아무리 자기들 가운데서 중한 인망을 얻은 사람일지라도 나라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는 자는 꼭 쓸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인조는 병자호란 이후 자신의 실추된 왕권을 지키기 위해 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치욕을 부른 책임을 척화파에게 전가하여 조선에서 배제시키고 최명길, 김류, 김자점으로 대표되는 주화파, 친청파를 신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명길 등도 전란의 책임을 척화파에게 전가하여 인조에게 영합하고 인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조정의 기존질서를 재편하려고 시도했다.
인조실록 - 인조17년 2월 -
정뇌경의 일에 대해 의논하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어찌 척화한 것이겠는가. 곧 나라를 그르친 것이다. 표문(表文)을 올려 신하로 칭하는 경우에는 대간이 극력 간쟁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다. 그러나 그때의 일은 사신을 보내어 화를 늦추려는 계획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무리들이 그 사이에서 가로막아 국사가 마침내 이에 이르게 하였으니, 죄가 어찌 적겠는가. 이른바 '시의에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지가 않다. 대신이, 대간의 논의가 한창 일어나고 있음을 듣고 곧바로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형세상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더라도 대각이 논집하고 있으면 임금도 뜻대로 단행할 수 없는데, 대신이 어찌 동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절절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때 말한 자가 상서롭지 못한 말을 많이 했었는데, 뒤에 모두 참언(讖言)과 같이 부합되었다. 오늘날에 와서 생각하니 대저 복없는 사람이다." 하고, 상이 성낸 빛을 띠니, 좌우 신하들이 묵묵히 있었다.
언관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의 관인들은 인조의 이러한 행보를 비판했다.
인조실록 - 인조 18년 6월 -
왕이 수성할 것에 대한 조석윤 등의 차자를 수정하게 하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은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나라를 일으켰으니, 위 문공(衛文公)이나 월 구천(越句踐) 같은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겪으신 병자년 난리는 들판이나 산에 거처한 데 비할 바가 아닙니다. 천지가 위치를 바꾸고 온 나라가 오랑캐가 되는 변고여서 위 문공이나 월 구천도 겪지 않았던 바입니다. 당시의 일은 종묘사직을 위해서였고 백성을 위해서였던 것으로, 표(表)를 바치고 신하라 칭하며 예를 낮추고 후한 폐백을 준 것은 참으로 모면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조종에 대한 일념이야 어찌 밥먹을 때나 쉴 때나 잊을 수 있겠으며, 우리나라가 자강(自强)하는 것을 어찌 하루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전란을 부른 책임을 인조반정 이후의 실정(失政)과 적폐(積弊)에서 찾았다. 나아가 그들은 와신상담과 복수(復讐)설치를 강조하는 상소를 올려 인조를 비판했고, 급기야 인조 왕통의 근본인 인조반정인 정당성까지 거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조는 친청행보를 쉽게 멈추려 들지 않았다. 인조의 왕권강화는 척화파 신료들을 대부분 제거하고, 비변사 중심의 반정공신들을 자신에게 영합하는 존재로 순치시킴으로써 가능했다. 병자호란은 결국 추대된 군주였던 인조가 늘 자신을 옭아매었던 인조반정의 명분을 뛰어넘고 반정공신들과 언관들의 견제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역설적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Ⅲ. 결론
임진·정유, 정묘·병자호란은 각기 16세기 후반, 17세기 초반에 한반도를 전장으로 하였으며, 그 결과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재편을 가져온 전쟁이었다. 임진·정유재란은 일본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조선간의 사대질서를 깨뜨리고 조선, 나아가 대륙으로 진출하려고 일으킨 침략전쟁이었다. 당시 조선의 종주국인 명이 조선파병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이견이 있었음에도 조선의 파병요청에 응한 것은 성리학적 명분론이 외교적 측면으로 드러난 것이자, 아울러 순망치한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보전하려는 목적이었다. 임진·정유재란에서 조선의 외교는 유성룡과 윤두서의 자주적 외교와 선조와 이항복 등의 사대적 외교의 공존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조선 초기에 보였던 자주적 외교의 일면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과의 정묘·병자호란은 인조시대의 대외적 갈등과 정체성의 혼돈으로(인조는 인조반정 즉 광해군의 실리적 외교에 대한 성리학적 질서유지 회복을 주시한 서인 층의 집권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정묘·병자호란으로 인조는 조선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통해 왕권 강화를 추진한다.) 지배층의 분열을 가져왔다. 이러한 지배층의 분열 속에서 민중들의 삶은 두 차례의 전란 속에서 피폐한 삶을 살았으며, 점차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을 밖으로 표출하게 된다.
Ⅳ.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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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5.28
  • 저작시기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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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38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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