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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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랑을 받고 400명의 호위대를 거느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나폴레옹은 5월 4일 엘바에 도착했다. 사실상의 유배였다. 프랑스에서는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왕이 됨으로써 다시 부르봉 왕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대로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아직 45세로 한창 때였으며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복고왕정이 곧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이미 대다수의 프랑스 사람들은 혁명이 거둔 성과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돌아온 루이 18세와 망명귀족들이 그것을 망가뜨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국민들은 의혹을 갖게 되었고 쫓겨났던 사람들의 저항과 음모가 되살아났다.
한편 나폴레옹은 대륙의 상황에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빈에서는 유럽의 앞날을 의논하는 회의가 열렸고 엘바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몇몇 외교관들은 나폴레옹을 더 머리 보낼 것을 의논했다. 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아내와 아들이 그에게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사실 그의 아내는 애인이 생겼고 남편과 함께 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에 대한 연금지불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은 나폴레옹을 분개하게 했고 그가 다시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엘바를 빠져나온 그는 1815년 3월 1일 칸에 상륙했다. 알프스를 넘을 때 공화주의자와 농민들이 그에게 모여들었고 그르노블 근처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달려온 군인들이 오히려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3월 20일 그는 파리로 들어갔으며 이제 한해 전에 몰락한 황제로서가 아니라 혁명의 화신으로 받들어지며 다시 권좌에 올랐다.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면 자코뱅당과 동맹을 맺어야 했으나 1793년과 1794년 처럼 사회주의적인 실험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믿은 나폴레옹은 루이 18세와 거의 똑같은 정치체제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 국민들의 열정은 썰물처럼 급속히 사라졌고 나폴레옹의 모험은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듯했다.
동맹군에 맞서 벨기에로 진격한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16일에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무찔렀다. 이틀 뒤 그는 영국의 영웅 웰링턴의 군대와 워털루에서 마주쳤다. 웰링턴은 당시 인도와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승장구 하던 영국 최고의 군사전략가 였다. 프랑스와 영국 최고의 군사 전략가가 한 곳에서 맞붙은 싸움이었다. 나폴레옹에게는 운명이 달린 전투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나폴레옹이 승리를 눈 앞에 두었을 때 게프하르트 불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도착하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나폴레옹의 패배였다. 웰링턴은 이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나폴레옹의 야망을 분쇄하여 그를 권좌에서 영구추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이후 웰링턴은 30여 년간 영국 내각과 의회에서 정치가로 활약했으며 1828년 총리로 임명되고 1842년 영국군 총사령관에 취임하기도 했다.
한편 퇴각하여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의회의 요구로 1815년 6월 22일 퇴위했다. 모든 것을 잃은 그는 7월 3일 미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영국 함대는 모든 프랑스 선박의 출항을 금지 했고 이에 그는 영국 정부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숙적에게 자신의 보호를 요청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영국 정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동맹국들의 의견을 감안해 멀리 떨어진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그를 억류하기로 결정했다.
1815년 10월 15일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에 상륙해 원래 부총독 관저로 지어진 롱우드(Longwood)에 자리 잡았다. 그는 영국군 장교가 수행하는 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으나 스스로 롱우드에 틀어박혔다. 그의 첫번째 비서였던 라스 카즈는 이 때의 생활을 나중에 <세인트헬레나의 회상>으로 엮어 냈다. 나폴레옹은 단조로운 은둔생활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도 가만 있는 것을 싫어하던 불타는 야심가가 조그만 섬에 갖혀버렸으니 오죽 답답했으랴. 더욱이 아내인 마리 루이즈에게서는 소식도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녀가 경호원인 오스트리아 장교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빈에 살고 있던 아들의 소식도 전혀 듣지 못했다. 더구나 세인트헬레나의 총독으로 부임한 허드슨 로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1817년말에 처음으로 위궤양이나 위암으로 보이는 병세가 나타났고 1821년 초부터는 병이 급속히 악화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4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 유골을 센 강변에 묻어 내가 그토록 사랑한 프랑스 국민들 속에 있게 해달라. 나는 영국의 과두정치와 그에 고용된 암살자들 때문에 내 명을 못다 살고 가노라.”
5월 5일 오후 5시 49분 전 유럽을 호령하던 작은 거인 나폴레옹 보나프르트는 52세도 안된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유해에는 그가 좋아했던 군복을 입히고 마렝고 전투 때 입었던 잿빛 외투를 덮었다. 루퍼트 밸리에서 소박한 장례식이 치러졌고 묘비에는 이름도 없이 “여기에 눕다(Ci-Git)”라는 말만 새겨졌다.
나폴레옹이 죽은지 19년 후인 1840년 12월 15일 루이 필립왕은 나폴레옹의 유해를 파리로 송환 시킨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일곱겹의 관속에 넣어졌는데 첫 번째 관은 주석, 두번째는 마호가니, 세번째와 네번째는 납, 다섯번째는 흑단, 여섯번째는 떡갈나무로 만들어졌다. 러시아에서 운반되어 만들어진 일곱번째 관은 대리석 관이며 녹색의 화강암 위에 얹혀있다. 이 대좌 밑 포석에는 그가 이끈 싸움터의 이름과 행적 등이 돌아가면서 새겨져 있고 유해 주위에는 그의 형제들과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장군들의 묘가 둘러싸고 있다.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된 앙발리드는 원래 루이 14세가 자신이 일으킨 전쟁으로 불구가 된 수 천명의 병사들을 위하여 세운 요양소였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그가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숨을 거둔지 19년 후인 1840년 12월 15일에 이곳 앙발리드 중앙에 있는 돔 교회당으로 이장되었다. 지금은 군사 박물관, 생루이 데 쟁발리드 교회당, 그리고 돔 교회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사 박 물관에는 전쟁기념품, 그림, 벽화등이 전시되어 있고 생루이 데 쟁발리드 교회당에는 나폴레옹이 정복한 나라들의 국기들이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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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5.28
  • 저작시기20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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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38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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