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물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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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대문물의 수용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근대과학의 수용
1.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
2. 근대과학기술의 도입- 교통․통신․전기
1) 근대적 교통․통신․전선 및 전기의 도입 배경
2) 사회간접자본의 전개과정
(1) 철도
(2) 통신
(3) 전기
3. 근대과학 수용의 성격
1) 주민생활의 변화
2) 근대문물 수용의 의의
Ⅲ. 근대학교의 설립
1. 정부의 근대학교 설립
2. 기독교계 사립학교
3. 민족 사립학교
4. 근대교육의 성격
IV. 근대 언론의 형성
1. 한성순보
2. 독립신문
3. 한말 언론과 계몽운동
V. 맺음말

본문내용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신교육운동단체-학회운동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 바로 언론 투쟁이었다. 이미 1890년대 후반기부터 국내에서는 민간신문이 발간되기 시작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정부와 열강을 상대로 언론활동을 전개해 왔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황제의 칙령으로 민간단체의 결성이 금지된 이후, 국민계몽과 여론형성에 있어 신문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신문의 논조는 러일전쟁 이전까지 문명개화를 기치로 하였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점차 국권회복이 주된 주제로 전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모든 신문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친일적 색채를 갖는 신문도 있었으나 한말 언론들의 기본적인 목표는 국민계몽을 통한 국권회복에 있었다 위의 책 39쪽
.
1)제국신문
<제국신문>은 1898년 8월 10일자로 창간되어 1910년 3월 31일자까지 10년 넘게 발간되었던 순 국문신문이었다. <제국신문>은 순 국문을 사용하여 하층민과 부녀자를 주된 독자층으로 삼고 있었다. 제국신문의 목적은 국민계몽에 있었기 때문에 국민에게 국문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하층민의 지식계발을 실천하였으며, 국가발전과 국권수호를 위하여 국민 실력 양성이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2) 황성 신문
<황성신문은> 국한문으로 발행되어 일반대중이나 부녀자보다 전통적인 지배층인 유생들을 주 대상으로 하였다. 이는 지배층에 대한 계몽이 시급하다고 인식한 까닭으로 짐작된다. 위의 책 64쪽
<황선신문>이 유학자계층의 계몽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과 관련하여 그 내용을 보면, 창간 이후 1904년까지는 강역제도실학 등 전통문화에 대하여 주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보수적인 유학자들에게 전통문화를 새롭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는 주로 외국의 망국독립개혁사를 통하여 그러한 목적을 이루고자 하여, 베트남 이집트와 같은 망국의 예와 일본이탈리아프랑스와 같은 독립개혁의 예를 소개하였다. 그 같은 경향은 이들 국가의 경우를 통하여 유림들이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인식하고, 그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교훈과 애국심을 기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위의 책 65쪽
1908년 이후에는 외국사기의 소개를 벗어나 한국사에 대한 긍정적 이해에 주목하였다. 단군숭배, 한국사의 고구려-발해 중심의 이해, 영웅과 국혼의 강조 등이 역사관계 기사를 통하여 찾을 수 있는 구체적 내용이다.
3) 대한매일신보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자로 국문으로 창간되었다. 영국인 베델이 사장이었고, 양기탁이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그 간행에는 황실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우세한 시기로 국내에 설치된 일본의 경무고문부에서 한국인 발행의 신문에 대한 사전 검열이 준비되고 있었다. 황실에서 자금을 지원하며 외국인을 내세워 신문을 발행하고자 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고려한 것이었다.
<대한매일신보>가 국문으로 발행된 것은 하층민의 계몽이 시급한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인데, 더욱이 한 면은 영문판으로 구성되어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편집은 유용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어 신문사에서는 지식인층을 먼저 계몽의 주체로 삼고자 신문을 국한문판으로 전환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의병 투쟁에 호의적인 기사를 작성하고, 국채 보상 운동의 확산에 기여하는 등 반일 논조를 유지했기 때문에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V. 맺음말
우리나라는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근대문물의 수용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영선사와 신사유람단 등을 통해 이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우리나라의 이권을 침탈하려는 열강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즉 우리나라는 내부적으로 근대문물 수용에 필요한 지식인을 양성하거나 근대문물에 대한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놓쳐 버린 채 서둘러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근대 문물은 우리민중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보다 열강의 이권침탈에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 문물의 수용이 열강의 이권 침탈을 목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근대문물은 민중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기보다는 생활권을 침탈하고 강제노역을 발생시키는 원망스런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계몽을 통해 국권강화를 이루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이후 국권침탈을 겪으면서 이런 정신은 민족 사립학교운동으로 이어졌다. 또한 학교이외에도 언론은 민중교육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개화시기 언론은 계몽을 주요 사업으로 전개했으며 국권침탈 이후에는 국권회복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우리나라는 주체적으로 근대문물을 수용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해 심각한 부작용을 겪어야했다. 그러나 개항이후 학교와 언론을 통한 지식인의 육성으로 근대문물을 발전시킬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고도로 발전된 과학기술을 갖게 된 것도 이런 노력의 토대 위에서 이뤄진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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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5.31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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