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Andy Warhol)의 업적, 디자인과 컨텐츠, 디자인이 문화화된 사례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 목 차 ]
1.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생애와 업적

2. 앤디 워홀의 성공 철학

3. 앤디 워홀에 대한 여러가지 시각

4. 앤디 워홀의 예술과 영화
4.1 예술을 바꾸고 싶다면, 매체를 바꾸어라
4.2 “미디어는 메시지다”
4.3 ‘팩토리’ 세계에 대한 찬가
4.4 내러티브의 도입
4.5 영화제작 제3기: 은둔의 제작자 시절

5. 디자인과 컨텐츠
5.1 아트인가. 광고인가.
5.2 “Factory” 가 갖는 의미

6. 디자인이 문화화된 사례

7. 앤디 워홀에 대한 평가

8. 결 론

본문내용

가는 작품의 스타는 더욱 유명해지는 길이 되기도 했으니 서로 좋은 것이다. 워홀의 대중상 비지니스와 용의 주도함,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뛰어난 사업 수단이 적중한 것이다.
워홀은 “Factory” 파티를 종종 열어 동네를 시끄럽게 했는데,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그의 커다란 실크스크린 현수막을 내걸고, 각종 스타들을 초대하고 따로 갤러리가 필요 없는 자신의 작업실 “Factory”를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작품과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곤 했다. 엄숙한 갤러리가 아니라, 파티 분위기가 나는 팝음악이 시끄럽게 흘르고 컨템퍼럴리하게 전시를 했다는 점은 그 당시에 굉장한 혁신을 일으켰다. 워홀의 훽토리 주위에 있으면 유명한 스타들을 직접 볼 수 있다라고 말 할 정도였다. 워홀이 시끄럽게 밤까지 파티 전시를 열던,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작품을 보여줘도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는 대중이 좋아하는 작품을 하고, 대중의 스타였기 때문이다.
워홀은 깡마른 체구에 머리에 가발을 쓰고 다녔고, 얼굴은 색소가 점점 없어지는 백반증을 앓게 되어, 그래서인지 우수꽝스러운 커다란 안경을 쓰고 다녔는데도 그가 하고다니는 스타일은 선풍적으로 뉴욕안에서 유행으로 퍼지곤 했다. 보통 사람들은 쓸 수 없을 듯한 가발도 그한테는 어울리고, 그의 가발과 안경은 그에게서 뗄 수 없는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6. 디자인이 문화화된 사례
그의 성공과 인기 비결은 역시 대중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그는 예술을 땅에 내려오게 하여 대중과 친숙하게 만들었다. 유명한 사람들을 작품 소재로 삼아 돈을 많이 벌기도 허지만, 케네디 대통령 부부 등 대톨령이나 정치인들을 작품으로 만든 것은 그 당시로서는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전기 의자, 자동차 사고 등 시세를 반영하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기도 하면서 또한 소, 신발, 꽃 등등 일상 생활에 평범한 형상들을 캔버스위에 반복하는 기법을 사용해 일반인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혔다. 워홀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중과 친숙한 팝아트와 광고가 정착된 것이다. 미국의 팝아트는 앤디 워홀로 인하여 상업적 디자인에 불과해 보이는 작품조차도 현대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위대한 예술로 믿게 하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기도 된 것이며, 판화는 대량 생산이 가능하여 희소성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고정 관념을 완전히 바꿔버린 장본인도 앤디 워홀이다. 그의 판화 작품이 그가 죽고 난 이후에도 가격이 세계 최고로 치솟고, 세계 미술 경매 시장에서 초고의 매출액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사업을 잘 하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예술이다. 돈을 버는 것은 예술이고, 노동하는 것도 예술이고, 굿 비지니스가 최고의 아트다,” ? 앤디 워홀
워홀은 종종 불만스럽게 물었다.
“왜 예술가를 특별하게 보느냐. 예술가는 단지 하나의 직업(just another job) 일 뿐이다.”
7. 앤디 워홀에 대한 평가
앤디워홀의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우선 앤디워홀은 '브랜드'이다. 그어떤 이름보다 파워풀하고 놀랄만큼의 파급효과를 불러온다. represent의 역할을 우리시대에 가장 잘해주고 있다.
다음으로 앤디워홀은 'Globalization'의 성공한 아티스트이다. 시골어느 학교에서부터 콧대높은 프랑스의 박물관까지 점령한 그의 작품이다. 이것은 마치 각종브랜드들의 글로벌화를 퍼뜨리는 기업과 같이, 그의 힘은 이미 '기업화' 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세상의 예술의 경계는 없다는 것을 증명한 그의 힘이다.
또한 그는 다매체적 작가의 시발점이 아니었나 생각되어진다. 그는 직접 매거진을 창간함과 동시에 그를 이용한 Celebrities 의 포스터를 제작해주었다. 또한 그의 대중매체에 대한 사랑은 직접 TV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더욱 강해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동시에 '상업성'을 이야기 하기도 하다. 결국 '상업성'을 가지게 되려면 'planning'이라는 기회를 거치게 된다. 즉 누군가의 needs를 분석하여 시장에 내놓게 되는 것이게 된다. 그는 매체를 자신의 것으로 요리한 아티스트 였다.
기존아트(fine art를 칭하는 것이다.)에 대해 일침을 가한 앤디워홀. 안티(anti)도 많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예술을 popular하게 만드는 기획력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간단한 수술후에 허무하게 죽었다는 앤디워홀이지만, 그의 죽음후에도 그의 작품을 이어가는 많은 사람들때문에 그는 더이상 허무하지도 속빈강정도 아니다. 뉴욕에 많은 아티스트들이(대표적으로-시발점이므로) 그를 따르고 아직도 사랑하고, 작품활동도 하고 있다.
8. 결 론
워홀은 그림에서, 사진으로, 그리고 영화로 미디어를 바꾸어가며 자신의 경력을 쌓았다. 그러면서 예술의 역할과 의미도 급격하게 바뀌었다. 아마 본인도 그 변화의 범위를 분명히 인식하거나 통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작가는 죽었다’는데, 작가가 예술 행위의 중심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변화의 큰 흐름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앤디 워홀의 몸을 거쳐 지나간 점은 그가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예술가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아마 인터넷의 가상공간에서 또다시 예술의 새로운 안테나 역할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여전히 대중은 새로운 미디어의 메시지에 당황해하며, 그의 작품에 환호할지도 모를 일이다.
부와 명성이 떨어질 줄 몰랐던 아트스타 앤디 워홀이 총격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1963년 6월 3일). 그를 총으로 쏜 사람은 발레리 솔리니스라는 페미니스트 저널리스트 였다. 그녀는 워홀의 훽토리 예술 노동자중의 한 일원이기도 했다. 기자들이 왜 워홀을 죽이려 했느냐고 묻자 “그가 내 인생에 너무 많은 영향을 끼쳤다”라고 대답했다.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넌도 한 광적인 팬에 의해 저격당해 죽음을 당한 것과 같은 것일까.
워홀은 이 사고로 죽지는 않았지만, 몇차례 수술 받은 후에 계속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담낭 수술과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한 합병증, 심장질환이 겹쳐 1987년 2월 2일 새벽 뉴욕 호스피탈 1204호에서 쓸쓸히 혼자 죽음을 맞이 한다. 그렇게 대중을 좋아하고 스타가 되고 싶어하던 그도 마지막엔 그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 가격2,5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9.06.29
  • 저작시기2009.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4357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