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丙子胡亂)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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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병자호란의 발생원인
1)정묘호란 (丁卯胡亂)
2) 후금(청)의 팽창 정책
3)후금(청)의 군신의 의(義) 강요, 명 정벌을 위한 군수물자 요구 거절.
4)청의 사신 “용골대” 추방
(2)병자호란에 대한 국내의 대응
1)척화파(주전론)
2)주화파(주화론)
(3)병자호란 경과
(4)병자호란의 결과
1) 장수나 관료의 공과에 관한 문제
2) 수양문제, 속환문제
3)효종의 북벌계획
(5)병자호란의 패배원인

본문내용

(君臣契) 요구로 양국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 두 번의 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전쟁의 위험성이 예고되어, 조선군의 훈련정도나 병기의 질이 청군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척화론(주전론)이 우세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조선군이 일패도지한 까닭은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기병인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하여 활을 가지고 적을 격퇴하는 장병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칼과 조총으로 근접전(단병전술)을 벌이는 왜군에 대한 대응 방법을 강구하여 포수(총), 사수(활), 살수(창, 칼)로 구성된 삼수병체제를 개발하였다. 그러나 이 삼수병체제는 북방의 여진과 싸우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산성 중심의 방어 전략 실패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청군은 조선의 산성을 무시하고 빠른 기동력을 이용, 대로를 따라 한성으로 밀고 내려왔다. 이에 조선군의 지휘체계는 마비되었고 청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산성중심의 방어 전략을 무력하게 만든 주원인은 ‘청야작전’(군량과 무기를 모두 산성으로 옮기고 미처 옮기지 못한 것들은 태우거나 파괴하는 것)의 실패에 있었다. 그 결과, 정묘호란 때는 막대한 관곡과 병기가 후금군 손에 들어갔다. 따라서 후금군의 진영에는 군량이 남아돌 지경이어서 그들 본국의 군량에 충당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병자호란 때도 조선측은 끝내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것이 병자호란의 주요 패배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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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7.11
  • 저작시기2009.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4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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