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이해)일선동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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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의이해)일선동조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일선동조론 ◉

<임나일본부설>

1. 임나일본부와 임나일본부설

2.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일본서기(日本書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송서(宋書)

♠칠지도(七支刀)

3. 한일학계의 기존 연구

♠출선기관설(出先機關設)

♠가야(加耶)의 왜설(倭設)

♠기마민족설

♠광개토왕비문 조작설

♠분국설(分國設)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設)

♠외교사절설(外交使節設)

4. 일본부관인의 출자와 6세기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한 임나일본부론

본문내용

·백제에 의해 무력하게 병합되어 가는 상황에서
대가야가 신라를 선택해 동맹관계를 맺어 백제에 공동으로 대항한다는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쓴 것과는 대비되게 안라가야는 신라·백제에 대한 외교적인 절충을 통해서 군사적인 압력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대외정책을 편다. 그래서 국제회의를 주재하지만, 백제측의 거센 외교적 공세 때문에 결렬되고 만다. 안라측의 독립에의 움직임은 이를 허용치 않으려는 백제·신라의 군사·외교적 공세에 상당한 타격을 입게된다. 뿐만 아니라 지배층 내의 분열, 이반이라는 내부적인 요인도 안라가야의 독립운동을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후 백제·신라의 각축장이 된 안라가야는 여·제 양국의 군사적 충돌이라는 국제적 동요에 의해 550년대에 들어가면 사실상 신라의 종속하에 놓이게 되어 가야의 독립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되고, 가야 연맹은 해체를 보기에 이른다. 이상의 검토에서 6세기 전반 안라가야에는 왜왕권의 지배의 논리를 증명할 만한 요소가 없었으며 또한 정치·군사적인 개입에 의한 안라에의 영향력 행사 등의 상정도 인정하기 어렵다. 6세기 이후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안라의 역사는 백제·신라의 정치·외교·군사적인 외압과 이에 대한 대응의 시대였다. 여기에 단지 안라의 독립운동회의에 왜의 사자의 참여 사실이 인정될 뿐이다. 왜왕권의 군사적 개입은 백제가 신라와 대항관계에 있던 특수한 상황하에서 입안되었으나 실현된 흔적은 없다. 요컨대 6세기대의 백제·신라·가야 제국 그리고 왜왕권 등 4자의 관계를 검토해 볼 때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상 성립하기 어렵다.
일선동조론도 현재에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과거사이다. 인류의 모든 과거사는 역사를 기술하는 현재적 상황에 따라 다시 씌여 질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기술의 특성이 두 얼굴을 가지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긍정적으로는 과거의 사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재검토 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서도, 부정적으로는 현실적 상황에 맞춘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라는 가능성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대 한일관계사의 연구처럼 이러한 역사기술의 양면성이 두드러졌던 분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고대한일관계사를 복원하는데 이용하고 있는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와 같은 사서류의 편찬도 그러하였지만, 특히 근대에 들어 일제의 조선합병을 전후로 한 왜곡된 해석이나, 광복 이후 부터 전개되었던 남북한의 감정적 반발과 같은 것은 긍정적 측면 보다는 부정적 측면이 더 많이 작용하였던 결과였다.
과거에 일본학계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을 내세워, 원래 일본과 조선은 같은 민족이었고 한남부를 지배하였으므로, 1910년의 합병은 같은 민족을 다시 합치는 것이며, 과거의 지배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광복 이후의 북한과 남한학계는 이에 대한 감정적 반발로서 `분국론(分國論)`과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說)`을 주장하였다. `분국론`은 삼한 삼국의 주민들이 일본열도에 이주하여 독립된 분국을 세워 통치하였다는 주장으로 한민족의 `일본열도경영론(日本列島經營論)`과 같은 내용이며, `백제군사령부설`은 한남부의 가야지역을 통치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백제였는데, 이를 <일본서기>가 백제를 일본으로 바꾸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한일양국의 주장들이 전혀 상반된 결론을 제시하고는 있으나, 이들이 근거했던 자료 자체가 서로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 동일한 자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입장이나 시각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서로 달랐던 입장이나 시각이란 각각의 견해들이 제시된 한일양국간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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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7.17
  • 저작시기20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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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4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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