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와 베버의 대립 (발표용PPT파일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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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와 베버의 대립 (발표용PPT파일도 있습니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크게 기여했음을 인정하지만, 자본주의 정신의 가장 중요한 뿌리는 칼뱅주의라는 결론을 내린다.
칼뱅주의, 현세적 금욕주의와 자본주의 정신
칼뱅주의는 다른 어느 프로테스탄트 종파보다도 신의 초월성을 각별히 강조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구원예정설’은 신의 초월성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어떤 행동이나 업적을 통해서도 신이 정한 이 운명에 대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칼뱅주의의 이 두 가지 독특한 교리는 서로 결합하여 신도들의 실존적 자세 및 윤리적 원칙에 하나의 독특하고 적극적이며 금욕주의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칼뱅주의 신도들은 자신의 구원 혹은 저주 여부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해 줄 수 있는 적절한 일상적 행동 및 사고 양식을 찾았고 베버는 이 행동약식을 ‘현세적 금욕주의’ 라고 표현하고 있다.
구원 예정설은 신도들의 내면에 엄청난 긴장을 형성했고 동시에 신의 초월성이라는 교리는 ‘세계’를 하나의 철저히 객관화된 영역 즉 세속적이고 의도적 행동을 통해 조작할 수 있는 영역으로 ‘탈주술화’했다. 이 두 가지 교리가 서로 결합하여 작용한 결과, 개개인은 금욕주의를 통한 자신의 세속적 소명의 완수와 신의 의지의 실현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현세적 금욕주의와 자본주의적 정신은 서로 조응하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적 기업의 목적은 이윤의 지속적이고 무한정한 극대화이다. 이는 현실을 자신의 역동적인 개입을 통해 지배하고 개조할 수 있는 ‘끝이 열린’ 실천의 장으로 보고 있는 칼뱅주의 소명관과 연결시킬수 있다.
또, 현세적 금욕주의자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물을 즉각적으로 향유하지 않고 억제하는 성향은, 기업가가 증가된 이윤을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직접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본 증식을 위해 지속적으로 재투자하는 행동과 연계된다.
자본주의 정신과 현세적 금욕주의의 관계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선택적 친화력의 관계’이다. 즉,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의도적으로 창출해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자본주의 정신이 종교개혁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맑스와 상호보완적인 자본주의론
맑스는 경제적 생산 영역에 대한 관심 때문에 “어떻게 자본주의적 산업조직이 노동자들로부터 생산 수단을 빼앗게 되는가?” “왜 현대의 산업노동자들은 자신의 도구를 소유하지 못하고 자기를 지배하는 사람에게 그의 노동력을 팔지 않을 수 없게 되는가?”에 대해 자세히 기술했다. 베버는 이런 분석의 대부분을 지지했으나 자신의 논리에 입각하여 생산수단의 수탈은 자본주의의 결과라기보다는 모든 합리화되고 중앙집권화된 생산체계의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상이한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수탈은 자본주의 체제뿐 아니라 사회주의 생산체계에서도 특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맑스는 생산 영역에만 거의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산수단 상실이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 가운데 한 특수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간과했다고 베버는 주장한다. 더 나아가 현대 사회의 모든 중요한 영역에서 인간이 대규모 조직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행위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베버는 니체와 맑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관념과 이해관계에 대한 사회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베버의 관념의 자율성은 “관념은 집단이익의 표현이며 계급이나 정당간의 투쟁에 무기의 구실을 하는 것”이라는 맑스의 생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의 계층이론이나 경제행위이론은 맑스 경제학과 사회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근대적 관료제와 자본주의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베버와 맑스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맑스는 관료제에 대해 '지배계급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각을 가져 관료제는 자본가들의 착취를 도와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베버는 관료제의 성립에 있어 특정 유형의 경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그 유형의 경제가 바로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적인 경제의 형태가 중세봉건적 세습질서를 무너뜨리고, 합리성을 발현시킨다는 논리이다. 즉, 두 사람의 논의에서 자본주의와 근대적 관료제가 친화성을 갖는다는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근대적 관료제가 친화성을 갖는다는 얘기가 두 사상가의 유사점인 동시에 차이점의 출발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맑스는 '하부구조로서의 자본주의, 상부구조로서의 관료제', '지배계급의 도구로서 관료제' 라는 시각을 가진 반면, 베버는 '합리성의 증진, 세습적 요소가 타파될 수 있는 기반으로서 자본주의' 라는 시각을 가졌다.
베버는 유물론적 시각이 가진 창조적이고 색출적인 기능을 곳곳에서 강조하면서, ‘이념’들이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는 항상 경제적 이해관계의 결과라고 하는 것은 매우 유용한 통찰임을 지적하고 있다. 베버에 의하면 이념들은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이지만 동시에 이해 관계 상황을 항상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이념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경험과학적 기여이지, 결코 관념론적 역사관의 옹호는 아니다. 오히려 (1)“경제적변동에서 종교 개혁을 필연적인 것”으로 연역해 낼 수 있다는 명제(유물론적 명제) (2)“자본주의적 정신은 순전히 종교 개혁의 특정한 영향의 결과로만 탄생할 수 있었다.”거나 “경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가 종교 개혁의 산물”이라는 견해(관념론적 견해) 등인 교조적인 명제들을 비판하였다.
베버와 맑스의 자본주의론은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이다. 베버와 맑스는 근대 서구 문명의 가치와 운명에 대해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문제 제기를 시도했다. 원래 ‘수단’이었고 또 수단이어야 할 ‘노동’과 ‘이윤추구’가 목적으로 전화한 주객전도의 체제하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베버는 이를 “우리는 직업인간이 되는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베버는 이 직업인간이 아무런 비전도 가치도 추구하지 않는 ‘감성 없는 향락 인간’ 으로 전락할 수 도 있지만, 이는 필연적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합리성’의 해방적 잠재력과 부정적 파괴력 중 어느 것이 역사를 주도할 것인가는 우리 개개인의 가치 결단과 적극적 실천 의지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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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9.07.28
  • 저작시기2009.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47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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