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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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레미제라블 서평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빅토르 위고의 삶과 작품세계

2. 레미제라블 작품 요약 및 분석
(1) 제1부 팡틴
(2) 제2부 코제트
(3) 제3부 마리위스
(4) 제4부 목가와 서사시
(5) 제5부 장발장

3. 야만의 시대, 그 속에서의 끊임없는 자기성찰 과정

본문내용

해야 사제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거나 장발장이라는 자가 주교를 잘 만나 잘 살게 되었더라는 식으로 기억하게 한다. "레미제라블"이라니…! 이 이야기는 비참한 사람들(the miserables)의 이야기인데. 레미제라블은 신은 자비를 베풀지만 사탄은 인간에게 유예를 주지 않고 심판하고 싶어하며, 인간은 근원적으로 약하다는 생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더 선명하게 부각된다. 인간이 어떻게 약한가? 인간은 먹어야 하고, 또 연애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연애는 性을 포함한다. 이것은 존재의 무거움인 동시에 존재의 가벼움이다.
가난하고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장발장이 19년 간 교도소에 수감된 것을 빵 때문이다. 인간은 먹지 않고 살 수 없다. 그러나 장발장 살기 위해 훔친 빵은 그를 인간성이 부인되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 그는 이렇게 해도 죽고, 저렇게 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팡틴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다. 순진한 시골처녀는 부잣집 대학생의 연인이 되자 사랑은 그저 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시대에 피임 같은 것은 없어서, 대학생이 변심하고 나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사람들이 "사생아"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여자아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남의 눈에나 "사생아"이지 그녀에게는 목숨 같은 아이다. 남녀간의 사랑이란 인간에게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근원적인 것이 이 여자를 파괴한다. 아이를 아무 여인숙에나 맡기고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것도 비인간적이지만 아이를 살리기 위해 매춘을 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성의 부인에 가깝다. 이 여자가 죄를 지은 것인가, 아니면 인간 존재가 본시부터 흔들리는 것인가.
장발장이 주교에게 받은 은그릇이며 은촛대는 자비나 사랑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것은 근원적인 인간조건을 바꿀만한 사랑은 아니다. 그저, 어두운 방안의 불빛, 혹은 근원적인 모순 안에서도 숨이 다 할 때까지는 살아야 한다는, 그러니 힘을 내라는, 위로일 뿐이다. 사랑은 장발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장발장을 둘러싸고 있는 딱딱한 방어막을 넘어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뿐이다. 저 사람이 너를 "형제"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하고. 저 사람이 "형제"라고 부르는 너는 누구냐고.
살아있는 날의 하루하루는 싸움이다. 전과자로서 감호 대상인 장발장은 신분을 위조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신분을 위조하는 것 자체가 위법행위를 구성한다. 장발장은 남 프랑스 어느 도시에 구슬공장을 짓고,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준다. 전과자였다고 하지만 그는 유능하다. 그는 이 도시의 가난을 다 구제하지는 못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그가 뻗친 도움의 그물은, 인간이 인간을 향해 던지는 모든 그물이 그렇듯, 너무 성글어서 팡틴은 그 그물의 틈새로 빠져 버린다. 그의 합리적인 공장경영 방식은 이 비숙련공이 사생아를 키운다는 이유만으로 동료들의 버림을 받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 때쯤 해서 엉뚱한 사람이 장발장이라는 혐의로 잡혀 들어간다. 자수할 것인가, 자수해서 멀쩡한 공장이 전과자의 공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너져 내리게 둘 것인가. 그러면 저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을 것인데. 그것은 옳은 일일까. 모르는 척 할 것인가. 그가 익히 잘 아는 그 캄캄함 안으로 다른 사람을 대신 밀어 넣을 것인가. 그렇게 끔찍한 일을 그가 어떻게 할 수가 있을까.
장발장은 법정에 가, 자기가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결백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하고. 주교가 은촛대를 주었을 때, 스스로에게 물었듯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이번에도 삶은 배수진이다. 장발장이라는 것을 밝히면 법률이 그를 쫓을 것이라 그는 두 번 다시 밝은 빛 아래서 활동할 수 없을 것이고, 밝히지 않으면 자기는 신 앞에서, 하늘 아래에서 고개를 들고 설 수 없을 것이므로. 그에게 있어 "내가 장발장"이라고 밝히는 것은 그 공장을 경영하는 것이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공장을 경영하고, 그 일에 소질도 있지만, 그것이 "자기 몫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자리를 버린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일은 어린 아이 하나를 키우는 아주 작은 일이다. 혈육도 아닌 작은 아이. 그것도 출세를 하고 이름을 날릴 가능성이 있는 사내아이가 아니라 계집아이.
자베르는 "너 같은 자는 절대 변할 수 없다(Men like you can never change.)"라고 수없이 으르렁거린다. 자베르는 악마이지만, 인간에게 소소한 죄를 저지르라고 꼬이는 가볍고 경망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란 더 나아질 수 없다고, 배고프면 그저 훔치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눈 맞으면 책임 못 질 사생아나 낳는다고 선고를 내리는 냉정한 악마이다. 사정이야 어쨌든 장발장도 팡틴도 "티 없이 깨끗한 손"을 가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너무나 단호하다. 왜 기독교에서 절망을 "죄"라고 말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할 만큼 말이다.
이 이야기는 그 절망에 대한 대응자세에서 광신도의 수준을 넘어선다. 장발장은 주저앉아 덮어놓고 참회만 하거나 "하느님의 힘으로" 악마를 물리치지 않는다. 그에게는 드러나는 대단한 승리도, 온전한 패배도 없다. 그는 파리 변두리,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연립주택에서 예전에 만들어둔 가명 연금계좌에서 이자를 타서 산다. 아이가 자랄 동안 세상은 시끄럽지만 장발장 주위에서는 별 특기할 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내내 묻고 있을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하고. 그 질문은 쉬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질문의 무게는 너무 무거워, 자베르조차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 질문이 너무나 치열해서, 죽음을 앞 둔 장발장은 기꺼이 수양딸에게, 나는 네 아버지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나는 이제 저 이름 없는 자들의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져도 아무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레미제라블은 어쩌면 자기성찰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악마도 비껴간다는 것, 그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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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8.24
  • 저작시기2009.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0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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