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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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유사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삼국유사란 무엇인가

2. 저자 일연의 생애

3. 삼국유사의 내용

4. 삼국유사의 집필 배경

5. 삼국유사의 집필 목적

6. 삼국유사의 역사적 의의

7.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비교

8. 역사를 바라보는 눈

본문내용

짊어지고 있는 과제였기 때문에 자연히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拜外的인 경향을 띤 중국중심의 사관에 대한 비판은 근대에 민족사적인 자각이 커가면서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이점 또한 「삼국유사」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삼국유사」에는 풍부한 신화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대한 이와 같이 근대사학의 평가에도 제약이 있다. 우선 사료적 가친 그것이 사료집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一然이 전혀 예기하지 못한 일이었다. 만일 원사료들이 亡失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면 사료적 가치에 대한 문제는 거론되지 않을 성질의 것이다.
가령 甘山寺의 조상명은 실명이 남아있어서 훨씬 자세하고 정확한 원문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약기되고 잘못된 판독이 섞여있는 「삼국유사」의 인용문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또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 「삼국유사」와 근대사학이 軸을 같이하지만, 그렇다고 「삼국유사」에서 제시된 고대사관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다.
7.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비교
體裁의 성격
三國史記가 왕명을 받들고 金富軾이하 10여명의 편찬위원들이 편찬한 정사(正史)였던 데 대해서, 三國遺事는 一然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사찬서(私撰書)였다. 이 점은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체재(體裁)를 성격이 매우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즉 「三國史記」는 중국에 있어서 정사를 편찬하는 표준적 체재인 기전체(紀傳體)를 취하게 하였으나, 「三國遺事」는 저자의 관심의 각도에 따라서 자유로이 주제를 선택할 여지가 더 많이 허락되는 체재를 갖추게 된 것이다.
「三國遺事」의 體裁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저자 개인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자유로운 형식의 사서류(史書類)인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三國史記」도 일정한 목적 밑에 기사(記事)를 선택하고 예대한 편찬자들의 해석을 가미시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사로서의 성격상 왕실 중심, 통치자 중심의 사료가 주된 편집 대상이 되었다. 「三國史記」에서 민중 관계 사료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은 그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三國遺事」는 그러한 제약을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귀족이나 민중이나 간에 일연은 아무런 제약 없이 관심의 대상이 된 사료들을 수집하여 수록하였다.
이 점에서 三國遺事는 三國史記에 비하여 주제나 사료의 선정이 훨신 자유로왔다고 볼 수 있다.
서술방법
三國遺事는 三國史記와는 달리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과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三國史記」는 극히 적은 분량인 사론을 뺀다면 어디까지가 사료이고 어디부터가 편찬자의 의견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운 서술방법을 취하였다. 원칙적으로 「三國史記」가 기존사료의 편찬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때로 필요에 따라서 본문의 서술 자체를 편찬자의 목적에 맞추어 수정가필(修正加筆)하고 있다. 이것은 「해동고승전」이나 「역옹패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이에 대해서 「三國遺事」는 그와는 다른 독특한 서술방법을 취하였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에 그는 상지론지 의왈(議曰) 등으로 분명히 자신의 의견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三國遺事」의 편찬은 전거(典據)를 밝혀서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방식을 취한 결과 일연은 자연히 많은 사료를 수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신의 논거를 굳게 뒷받침해 주려고 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史學史的 의의
「三國史記」는 仁宗 23年(1145)에 고려 귀족문화를 정리하고 강렬한 國家意識을 표출하는 가운데 中國의 歷史觀을 수용하면서도 독자성과 융통성을 강조하여 현실긍정과 합리성이 두드러진 사서이다.
그런데 一然이 「三國遺事」전편을 통해 강조하는 신이(神異)는 민족 自主性과 문화의 優位性을 내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외세의 압제에 대항하여 그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의 원천이 자기 전통이라는 강한 확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민족사를 파악하는 精神史觀에 의해 대단히 폭넓은 역사와 불교를 정리하였다. 一然이 각고 끝에 수집한 사료의 典據를 소박한 표현으로 명시하고 자신이 직접 답사하는 등의 용의주도한 노력으로 고증한 수많은 서목(書目)이 실린 「三國遺事」는 다양함이나 치밀함에서 「三國史記」보다 훨씬 뛰어나며 원사료의 본모습을 더 많이 전해주어 그만큼 사료적 가치도 높다. 객관적 서술태도를 가지고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撰述태도로 採錄한 많은 민간전승 자료들이 古代文化의 原型에 더욱 가깝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一然이 차지하는 史學史的 의의는 대단히 크다.
8. 역사를 바라보는 눈
역사서술은 저자의 다양한 인식체계 아래 서술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명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한 사건은 색다르게 비춰진다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인식의 동기는 과연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그것은 현재까지 사학체제에 영향을 미치는 양 사서의 서술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저술 당시의 사회상황과 저자개인의 경험을 통해 획득된 눈을 통해 서술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저자의 역량에 따라 보충 또는 삭제를 통해 전말을 제시함으로써 역사는 빛을 발할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같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동시대에 저술되었음에도 당시의 시대배경과 저술목적, 그리고 저자의 생애 및 서술상의 방법차이에 의해 전형적인 관찬과 사찬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후세에 있어서의 전대 사학자와 사서에 대한 인식도 후세 사학의 인지를 통해 재조명될 수 있음을 전술을 통해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역사가 수레바퀴와 같이 돌고 도는 재반복의 진행과정이라 한다면 진정한 역사서술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것은 하나의 사건을 통해 진실을 볼 수 있고 역사가 재반복의 과정을 통해서도 앞으로 진보할 수 있도록 보조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 논하는 바이다. 이러한 점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민족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정신을 알려줌으로써 민족의 진일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역량을 제시한 역사적 사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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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9.08.29
  • 저작시기2009.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0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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