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사화를 중심으로본 조선시대 당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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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4대사화를 중심으로본 조선시대 당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훈구파
2. 훈구파와 사림파의 성격 비교
3. 사림세력의 대두와 정치적 성장
4.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5. 사화의 전개와 배경
6. 사화의 발생
7. 사화의 영향
Ⅱ. 붕당정치
1. 붕당정치의 배경
2. 붕당정치의 전개
3. 붕당정치의 긍정적 측면
4. 붕당정치의 부정적 측면
5. 사화와 붕당정치의 비교
레포트 작성후 소감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러나 거기에는 왕권의 강화와 정책 비판 기능에 큰 비중을 두었던 남인과 대신 주도의 정치를 지향했던 서인간에 정치적 노선의 차이가 깔려 있었다. 서인이 왕실의 권위를 깎아 내리려 한 반면 남인은 그것을 지켜주려던 것이었다.
남인의 집권 이후 재집권의 기회를 엿보던 서인은 남인의 일부가 왕족과 결탁하여 역모했다고 고발함으로써 전체 남인을 정권에서 몰아내고 다시 집권하였다.(경신환국, 숙종 7년, 1680년)
이 때부터 집권당파가 자기 당파의 영구적인 집권을 위해 상대 당의 재기를 철저하게 봉쇄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전하! 사약을 내리소서`하는 식의 상대 당에 대한 보복이 횡행하면서 여러 당파가 공존하며 공론을 유도하는 붕당의 원칙이 무너져갔다. 숙종 때 다시 집권한 서인은 곧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분열도 전혀 정책적인 대립이 아닌,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송시열)와 소장파(윤증)의 파벌적 대립이었다.
이후 서인은 장희빈에게서 난 왕자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쫓겨나고 한 때 남인이 다시 집권하였다.(기사환국, 숙종 16년, 1689년) 그러나 왕의 마음이 장희빈에게서 왕비(인현왕후)에게로 돌아가자 다시 서인이 집권했다. 이후 남인의 대부분은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갑술환국 , 숙종 21년, 1694년)
신구 정치세력의 대립, 복제 문제를 둘러싼 정치세력 사이의 분쟁, 왕비와 후궁 쪽으로 나뉘어진 붕당간의 싸움 등으로 이어져 온 붕당정치는 다시 왕과 그 형제, 혹은 왕과 왕자 사이의 대립을 계기로 계속되었다. 숙종 말년에는 소론이 경종을 두둔한 반면 노론은 그의 아우 영조를 지지하였다. 이에 따라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소론이 집권했고(1721년), 경종이 단명하여 영조가 즉위했을 때에는(1725년) 노론이 정권을 잡았다.
3. 붕당정치의 긍정적 측면
붕당정치는 학연과 지연을 매개로 의식과 정치이념을 같이하는 당인들끼리 붕당을 이루고, 언론활동을 통해 국왕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주관하는 정치형태이다. 그것은 여론을 앞세운 것으로서 비판세력이 공존하며, 특정 붕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산림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할 수 있어 건전한 정치풍토를 조성하였다.
4. 붕당정치의 문제점
붕당정치가 변질되어, 극단적인 정쟁과 일당전제화의 추세가 나타아자, 세력균형 위에서 안정될 수 있었던 왕권 자체가 불안하게 되었다. 붕당정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당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명분을 이용하는 병폐가 나타났으며 권력의 지속적인 독점을 위해 상대 당을 철저하게 궤멸시키는 현상이 문제점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서인이 재집권한 경신환국 이후 격렬하게 진행되어, 여러 붕당의 의견이 대립 조정되는 가운데 공론을 형성한다는 사림정치의 명분이 퇴색하기 시작하였다.
노론 외척 일당에 의한 세도정치기에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민란이 빈발하였던 데 비하면, 견제와 비판으로 집권당의 실정을 방지하는 붕당정치는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붕당정치가 일반화되면서 의리와 도덕을 지나치게 숭상하여 명분론과 허례에 빠져들었다. 또한 반대 당에 대한 포용성이 결핍되어 조선의 사회, 문화는 차츰 탄력성과 개방성을 잃어갔다.
5. 사화와 붕당정치의 비교
사화와 붕당정치는 다같이 양반지배층의 분열대립이고, 성리학의 이념적 차이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간에 벌어진 정치투쟁이며, 붕당정치는 사림파간의 정치투쟁이라는 점에서 구별되고, 사화는 일시적이었으나 붕장정치는 혈연ㆍ지연ㆍ문벌ㆍ학벌과 연결되어 장기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사화는 중앙이 무대였고, 붕당정치는 중앙과 지방(서원ㆍ족장ㆍ농장)이 무대였다.
레포트 작성후 소감
처음 레포트 작성 계기는 식민지지배시절 일본인들이 심어놓고 간 조선시대 붕당정치폄하론 때문이었다. 우연히 붕당정치에 대한 말이 나왔는데 그 주제에 대해 내가 한 말을 두고 한 친구가 “그건 붕당정치 폄하론적인 발언이다” 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반박하려 하였으나, 생각해 보니 난 정말 제대로 아는것도 없이 막연하게 “우리 나라 정치는 당쟁이 심한 불안정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내멋대로 붕당정치를 폄하하고 있다는것을 알게되었다. 정말이지 친구말대로 나는 일본의 의도대로 생각을 하고 있는것만 같아 매우 부끄러웠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붕당정치에 제대로 알아보리라 생각하던중, 이번 한국사 레포트 주제에 사화와 당쟁이 있길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두가지의 주제를 택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레포트 작성을 다 하고 나니 무척 뿌듯하고, 이제 누군가와 다시 이 주제에 관한 토론을 하게된다면 제대로 내가 알고있는 지식을 가지고 말할수 있다고 생각하니 매우 기쁘다. 이제 이번 레포트를 마지막으로 한국사수업을 마치게 되는데 많이 아쉽다. 사실 나는 수능끝나고 사학과를 갈것인가 문헌정보학과를 갈것인가 고민을 했었다. 결국 사서직업이 나에게 맞을것 같아 문헌정보학과를 택했지만, 나는 여전히 역사를 좋아하고 관심이 많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한국사 수업을 교양으로 택했는데,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수업도 관심가는 내용이었고, 무엇보다도 레포트 쓰는것이 그저 과제가 아니라 내가 흥미있는 주제를 조사하는 활동이어서 즐거운 경험이었기에 무척 좋았다. 앞으로는 한국사를 가지고 리포트를 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씩 시간을 내어 이렇게 역사의 한주제에 대해 깊이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조선성종기의 대간 연구 : 정두희, 한국연구원, 1989
한국사회사연구 : 이태진, 지식산업사, 1986
조선전기 기호사림파 연구 : 이병휴, 일조각, 1984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연구 : 정두희, 일조각, 1983
조선초기 사회경제연구 : 한영우, 을유문화사, 1983
16세기 사림의 진출과 정치구조의 변동과정 : 최이돈,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조선중종초에 있어서의 대신과 대간의 대립 〈경북대학교 논문집〉 5 : 박영규, 경북대학교, 1962
조선 성종시대의 신구대립 〈근세조선사연구〉 1 : 신석호,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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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0.05
  • 저작시기20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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