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스이코(推古)조와 아스카(飛鳥)문화
(2) 오닌(応仁)의 난(乱)
(3) 혼노지(本能寺)의 변(変)
(4) 임진왜란
(5)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6) 메이지유신(明治維新)
(7) 청일전쟁(淸日戰爭)
(8) 러일전쟁(露日戰爭)
(9)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10)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2) 오닌(応仁)의 난(乱)
(3) 혼노지(本能寺)의 변(変)
(4) 임진왜란
(5)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6) 메이지유신(明治維新)
(7) 청일전쟁(淸日戰爭)
(8) 러일전쟁(露日戰爭)
(9)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10)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본문내용
7만평 규모의 난징 대학살 역사관을 설립 일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려고 하고 있다.
몇몇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늙은 노인까지 잔인하게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라고 전해진다. 강간 직후 여성들은 즉시 살해됐는데, 주로 수족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또한 일본군은 누가 100명을 먼저 살해하는가를 놓고 경연대회를 열어 포상하기도 했는데, 당시 참수경쟁 가담자는 1948년 중국 정부에 의해 총살당한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츠요시였다. 심지어는 중국인 포로를 총검 훈련에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사진 촬영이 취미였던 무라세 모리야쓰가 촬영하였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부 양심적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극우 인사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심지어는 교과서에서 난징대학살을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중국 정부와 대립하고 있다.
또한 사상자의 숫자가 매우 제각각 이며, 서양의 서적들 중에서도 4만2천명 설을 언급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15만이나 20만명 설까지 다양하다. 또 일본내에서는 양심적인 사학자라고 불리는 사학자들도 중국측의 30만이라는 숫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대표자인 카사하라 토쿠시 츠루 문과대학교수나 와세다 대학교교수인(지금은 고인) 호라 도미오조차도 25만명 이상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기타 20만명설, 15만명설, 1만명설, 3천명설, 심지어는 일본우익진영에서는 40~50명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많아봐야 1~2명설, 아예 없었다는 설까지 있다.
몇몇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늙은 노인까지 잔인하게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라고 전해진다. 강간 직후 여성들은 즉시 살해됐는데, 주로 수족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또한 일본군은 누가 100명을 먼저 살해하는가를 놓고 경연대회를 열어 포상하기도 했는데, 당시 참수경쟁 가담자는 1948년 중국 정부에 의해 총살당한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츠요시였다. 심지어는 중국인 포로를 총검 훈련에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사진 촬영이 취미였던 무라세 모리야쓰가 촬영하였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부 양심적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극우 인사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심지어는 교과서에서 난징대학살을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중국 정부와 대립하고 있다.
또한 사상자의 숫자가 매우 제각각 이며, 서양의 서적들 중에서도 4만2천명 설을 언급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15만이나 20만명 설까지 다양하다. 또 일본내에서는 양심적인 사학자라고 불리는 사학자들도 중국측의 30만이라는 숫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대표자인 카사하라 토쿠시 츠루 문과대학교수나 와세다 대학교교수인(지금은 고인) 호라 도미오조차도 25만명 이상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기타 20만명설, 15만명설, 1만명설, 3천명설, 심지어는 일본우익진영에서는 40~50명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많아봐야 1~2명설, 아예 없었다는 설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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