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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형원][유형원의 사상][유형원의 실학사상][유형원의 경세학][유형원의 조세와 재정][실학사상][실학자][실학]유형원의 사상, 유형원의 실학 사상, 유형원의 경세학, 유형원의 조세와 재정에 관한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유형원의 사상
1. 성리학
2. 이기설
3. 도(道)·기(氣)

Ⅲ. 유형원의 실학 사상
1. 실제에서의 인식
2. 기준의 객관적 정립
3. 실학에서의 본말론

Ⅳ. 유형원의 경세학
1. 이상 국가상
2. 이상국가의 기획과 경세학
3. 인민의 지위

Ⅴ. 유형원의 조세와 재정
1. 조세 구성
1) 전세
2) 공상어염세(잡세)
2. 인민의 부담
1) 토지 배분에 따른 부담, 농민일 경우의 부담
2) 공상인, 어염업 종사자, 기타일 경우
3. 재정의 구성
1) 수입
2) 재정 지출 배정 방식
3) 중앙과 지방의 재정 배분 기획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부담은 완료된다.
하지만 유형원은 지방의 공상인은 농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토지를 배분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유형원은 이들에게도 토지가 배분되어야 하는 이유로서, 이들에게 토지를 배분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상공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 상공업을 포기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본인은 상공업을 전업하지만 가족들이 있으므로 농사를 짓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다만 인구는 많고 토지가 부족한 고을의 공상인은 토지를 배분받지 않도록 하였다.
3. 재정의 구성
1) 수입
재정의 수입은 경상 조세인 전세와 공상어염세(잡세)로 구성된다. 유형원은 이 이외에도 각종의 속전이나 입안 지가 등의 수입도 원칙적으로 정식의 재정수입으로 계상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유형원은 실제로 예산을 편성하면서는, 재정 수입으로 일단 전세 수입만을 계상하였다.
2) 재정 지출 배정 방식
그가 구상한 재정 배정 방식은 두 가지 였다. 하나는 쌀 얼마라는 식으로 예산액을 직접 배정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토지 얼마를 할당해주고 해당 토지의 전세를 받아 사용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3) 중앙과 지방의 재정 배분 기획
유형원의 재정 배분 기획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국가 경비를 경상 재정체계에 편입시켰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전에는 중앙 정부 차원에서는 관여하지 않고 알아서 각자 챙겨서 해결하도록 했던 부문들을 공식 재정 항목으로 새롭게 편입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지방 재정과 이서배를 비롯한 하위 공무담임자들의 녹봉이다. 그는 중앙과 지방의 재정을 그가 전면적으로 새롭게 구상한 토지제도, 학교제도, 직관제도, 녹봉제도, 지방제도, 군사제도 등에 대응하여 편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재정 배분 기획을 잘 따라가면 그의 각 부문의 구체적인 기획(관서의 구성, 인원배치, 사업내용)을 정연하게 파악할 수가 있다.
Ⅵ. 결론
조선 후기 실학자로써 유형원은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 세종 때 명재상인 유관(柳寬)의 9대손이며, 검열(檢閱)을 지낸 유흠의 아들로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2살때 인조반정으로 북인(北人) 유몽인(柳夢寅) 등의 옥사에 관련되어 아버지를 여의었다. 반계의 모친은 우참찬 이지완(李志完)의 딸로 바로 성호 이익의 당숙모가 된다. 반계의 원 고향은 남한강 하류 일대라고 추정될 뿐 어디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5세때 처음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어려서부터 재질이 영민하고 근면하였는데, 백가의 서적을 두루 섭렵한 독서가이기도 하였다. 14세 되던 해 병자호란이 터져 가족과 함께 원주로 피난을 가서, 그 뒤 지금의 양주땅인 지평(砥平)에 잠시 이사했다가 곧 여주에서 정착하였다. 일생동안 계속된 그의 연구작업은 대단히 광범위한 것이어서 정치·경제·군사·교육·사회 문제는 물론 역사·지리·언어 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그 외에 성리학·병법·선술(仙術)·문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약 20여종의 저서와 문집이 다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모두가 없어져 저술들의 내용은 연보에서나마 겨우 짐작할 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오직 19년간의 각고끝에 완성된 반계수록만이 전해져서 그의 폭넓은 학문세계를 대변하고 있다.
그는 현실이 개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하였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모순된 법과 제도를 혁파하려 했으며, 이것이 바로 이 저서가 만들어진 배경이 된 것이었다. 그의 학문은 그 당시 문인들에게도 평판이 자자했는데, 남인의 영수 허목(許穆)은 그를 한번 만나보고 왕좌(王佐)의 재목이라고 칭찬하였다.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그를 일컫어 전쟁을 당하여 수만 대군의 군량을 책임질 만한 포부를 가진 사람으로 평가하고 초야에 묻힌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오주 이규경(李圭景)은 그를 동국 제일의 인재로 손꼽으면서 경륜에는 유형원이라고 평가하였다. 반계는 이원진(李元鎭)·김세렴(金世濂) 등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21세에 백경사잠(百警四箴)을 지었으며, 정동직(鄭東稷)과 더불어 이기사칠(理氣四七), 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의 논(論)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할아버지의 강요로 33세에 진사시험에 응시·합격하였을 뿐 과거와 벼술을 거부하였다. 집안어른이 모두 별세하고 거상(居喪)이 끝나자, 서울을 떠나 전라도 부안군 우반리로 옮겨가서 죽을 때까지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는 실학을 창시하여 평생 동안 조선사회를 풍미하던 교조주의적 학풍을 부정하고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한 경세치용의 학술을 강조하였다. 그가 44세 되던 1665년(현종 6)에 재상들의 추천으로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굳이 사양하였고, 그 이듬해에도 특별추천으로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농민 속에서 생활하였던 17세기 중엽의 조선사회는 임란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아 농촌사회가 극도로 피폐한 시기였다. 그는 당시의 사회경제상태에 대하여 부자(富者)의 땅은 경계가 끝이 없을 정도이고, 빈자(貧者)는 송곳하나 세워 놓을만한 땅도 없어 식구를 이끌고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부자의 머슴으로 들어간다며 통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당시 사회 일각에서는 전쟁의 상처를 씻고 농촌을 부흥시키려는 의욕적인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나아가 각종 제도 전반에 걸친 개혁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었다. 그는 비록 권력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을 절감하였고 그에 대응하는 지식인의 사명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중앙정계가 당쟁의 와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농민들의 곁에 살면서 농촌부흥의 방향과 제도개편의 방법론을 연구하고 또 이를 실천에 옮기려 하였다.
참고문헌
▷ 송칠성(1996), 실학파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 윤혜성(1986), 반계수록을 중심으로 반계 류형원의 정치사상, 이화여자대학교
▷ 정성철(1988), 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정치적 견해, 한마당
▷ 주칠성(1996), 실학파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 천관우(1973), 류형원(인물로 본 한국사 소수), 월간중앙
▷ 한영우(1989), 조선후기사학사연구, 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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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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