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화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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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럽 문화의 이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유럽 문화의 이해
- 영국
*영국의 음식문화
*영국의 볼거리Ⅰ~ Ⅲ
*영국의 문화이야기

- 프랑스
*프랑스의 음식문화
*프랑스의 볼거리 Ⅰ
*프랑스의 문화이야기

-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음식문화
*이탈리아의 볼거리 Ⅰ~ Ⅳ
*이탈리아의 문화이야기

- 바티칸 시국

본문내용

운 도미티아누스 스타디움(Stadium of Domitianus)의 관람석 자리를 토대로 건설되었다. 광장 일대 건축물의 대표적 양식은 바로크 양식으로 넵튠분수, 모로분수, 피우미분수(Fontana Dei Fiumi)와 주변 건물들이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광장 중앙에 있는 피우미분수는 베르니니가 디자인했다. 피우미분수에 조각되어 있는 4명의 거인은 갠지스강·나일강·도나우강·라플라타강을 나타낸다. 광장 남쪽의 모로분수는 돌고래와 싸우는 이디오피아인의 모습을, 북쪽의 넵튠분수는 넵튠이 문어와 싸우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탈리아의 문화이야기
▶로마의 목욕 문화
역사상 로마인들만큼 목욕을 좋아했던 민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목욕을 개인의 행복과 쾌락을 위한 가장 중요한 행위로 여겨 이미 기원 전부터 부자들의 집에는 개인 욕실이 만들어졌고 도시 곳곳에 공중목욕탕이 생겼다. 로마인들에게 목욕탕은 단순히 목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교와 오락, 건강 들을 위한 다목적 장소로 이용되었다. 때문에 로마의 많은 황제들이 시민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대중목욕탕을 지어 로마의 황금기 때는 그 수가 900개를 넘었다고 한다. 로마에 처음 공중목욕탕이 생긴 것은 제정시대였으나 네로, 베스파시아누, 티투스, 카라칼라 황제 시대에 극에 달했다. 폭군 카라칼라 황제는 온갖 사치를 부려 신전과 분수, 음악당, 정원, 도서관, 체육관 등을 갖춘 욕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로마에 남아있는 카라칼라 목욕탕이다. 이곳은 한번에 16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목욕탕의 성행은 점차 혼욕문제를 비롯해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해 사치와 퇴폐적인 목욕문화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는 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SPQR'
로마 시내를 보면 맨홀 뚜껑, 게시판, 분수대 등 곳곳에 SPQR이란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원로원과 로마 시민을 뜻하는 공화정 시대의 표시다. 로마제국의 영광은 사라졌지만 이 표시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로마의 문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이탈리아의 자릿세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서 식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편안히 앉아서 먹으면 될 텐데 왜 불편하게 서서 먹을까? 바로 자릿세 때문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탈리아는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 자리에 앉는 순간에 자릿세가 붙는다. 문화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런 개념을 모르면 마치 바가지를 쓴 듯한 기분이 든다. 비싼 자릿세를 피하는 방법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듯이 현지인들처럼 서서먹는 것이다.
바티칸 시국
성베드로 성당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단순히 규모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서도 가히 세계 최대라 할 수 있는 성당으로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곳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웅장한 내부공간과 화려함에 압도당하게 된다. 입구로 들어가면 그 유리관 안에 있는 것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인 <피에타>상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가 성모마리아의 품에 안긴 모습의 이 조각상은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만든 것이다.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의 사인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이다. 피에타는 ‘자비를 베풀소서’ 라는 뜻의 피에타는 성모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은 고딕 조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흔히 예수의 몸이 마리아의 무릎 밖으로 뻗어 나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미켈란젤로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에 걸쳐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아왔다. 수많은 그의 회화·조각·건축 작품들은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그중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임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무엇보다도 조각가라고 여겼다. 그는 평생 대리석 조각에 몰두했으며 단지 일정 기간만 다른 분야의 예술작업을 했을 뿐이다.
성베드로 대성당의 둥근 지붕은 로마의 지배적 권위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보면 시각적 초점 역할도 한다. 그 지붕은 100년 전에 건물 내부를 덮는 목적보다는 그 외부의 효과를 주로 노린 최초의 거대한 돔형 지붕이었던 피렌체 대성당에서 유래한 것이긴 하나 미켈란젤로에 의해 이런 전환이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생전에 그는 성베드로 대성당 작업을 하면서 특히 지붕 아랫부분에 주력했다. 그는 앞서 그 대성당에서 일했던 건축가들의 건축개념을 버렸지만, 독창적인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의 개념만은 인정했
다. 그는 좀 더 최근의 설계에 따른 전통적인 라틴십자가 형태의 평면도 대신 사방의 길이가 같은 십자가 형태의 이전 설계도로 되돌아갔으며, 세부사항에서 브라만테의 내부 장식을 수정하여 훨씬 더 통일된 공간을 창조했다. 그의 실제 건축 작업은 대부분 제단 뒤의 둥근 벽에서 이루어졌는데, 거기에다 캄피돌리오 광장 건물들에서 이미 보여준 크고 작은 기둥들 간의 대조를 삽입했다. 둥근 벽면에 부착된 이 벽기둥들은 벽의 방향이 계속해서 바뀜에 따라 힘차게 위로 밀어내는 듯 한 느낌을 주며, 고르게 힘찬 수평적인 리듬을 자아내기도 하면서 거대한 규모로 박동하는 역동적인 건물을 만들어낸다. 미켈란젤로는 돔형 지붕의 기저 둘레에 원주가 세워진 통로를 만들어놓았다. 원주들의 꼭대기는 들보로 돔에 연결되어 있으나 원주들 사이의 지붕은 처리되지 않았다. 이렇게 이 원주들은 돔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육중한 힘을 떠받치면서 고딕 양식의 건축들에서 볼 수 있는 플라잉 버트레스의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 열주의 형식은 고전적인 것이며, 그것들로 이루어진 수평면은 둥근 지붕과 그 아래의 수평적인 건물 구조 사이에서 야기되는 시각적인 전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죽을 때까지 성베드로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로 일하면서 로마에서 많은 소규모 건축계획을 맡았다. 교황 파울루스 3세의 사저였던 파르네세 궁의 주요부분을 완성했는데, 꼭대기 층의 벽은 그가 지휘해 드물게 완성된 건축 부분에 속한다. 그밖에도 도시의 관문인 포르타 피아를 위한 설계와, 로마에 있는 피렌체 공동체 교회를 위한 설계와 같은 아주 상상력이 풍부하고 탁월한 설계도들이 이 시기의 것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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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1.10
  • 저작시기2009.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0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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