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시대적 배경
(1) 하은대(夏殷代)
(2) 주대(周代)
참고문헌
(1) 하은대(夏殷代)
(2) 주대(周代)
참고문헌
본문내용
배 양성에만 힘씀으로써 堯ㆍ舜의 聖世는 못 만든다 하더라고, 堯ㆍ舜의 이상세계를 펼 수 있는 진실한 인간인 군자를 길러 내고자 하였다 황인벽, 공자의 교육사상과 그 영향 및 실천방안연구, 공주대 교육대학원, 200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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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혼란한 시대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질서, 윤리체제 등 전반에 걸쳐 대개혁을 초래하였고, 각 제후는 賢人學者들을 경쟁적으로 우대하여 등용하였으며, 안으로는 부국강병을 실시하고 밖으로는 다른 제후국과의 외교책을 도모하여 오늘날과 같은 국제정치를 방불케 하였다. 이에 따라 학자들의 사상도 변이되었으며, 학문과 인재에 있어서 열국이 주 왕실보다 우수하였던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사회제도를 바로 잡아보겠다고 수많은 사상가가 나타났으니 사상적으로 활짝 핀 제자백가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老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무위자연을 주장하였고, 墨子는 ‘겸애와 평화사상’을 외쳤으며, 法家는 ‘강력한 법에 의한 전제정치’를 주장하였다. 孔子는 述而不作하며 溫故知新하는 보수적인 태도로 전래되어 오는 上帝와 천 사상에 인간을 접목시켜 인간중심의 仁思想을 발전시켰다. 김영재, “공자의 교육사상 연구”,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0, 15-16쪽.
공자는 전통적으로 엄격하면서도 자기 과시적인 衒學者로서 인간이 행동하거나 사고할 때에 따라야 할 엄밀한 규범을 제시한 사람으로 생각되어 오기도 하였다.
물론 그가 살던 당시 윤리적 규범의 약화와 사회질서의 혼란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으며, 윤리적 규범 및 사회질서의 재건을 위해 일생동안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도덕적인 관계망의 확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의무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가 획일적이고 강제적인 규범을 제시한 사람은 아니었다.
공자의 주된 목표가 구질서를 회복시키고 세습적인 귀족정치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고 하여 그를 봉건적 보수주의자라고 단정 짓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任機愈 編, 전원택 譯, 『中國哲學史』, 까치, 1990, 60-75쪽.
『論語』전반에 걸쳐서 나타나 있는 공자의 사상과 그가 일생동안 지향했던 목표를 주의 깊게 따져 볼 때, 그는 전통을 단순히 보전하고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전통을 취사선택하여 발전적으로 계승하려는 개혁적인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공자는 사회의 전체적인 개혁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실현에도 일정하게 기여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위대한 개혁자였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의 사후 수 세기 안에 세습적인 귀족정치는 사실상 중국에서 소멸되었으며, 공자는 그 누구보다도 그러한 변화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젊은 시절 그는 賤職에 가까운 직책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평민들과 그들의 삶에 대해 깊은 관심과 동정심을 갖게 되었으며, 평생 동안 그것을 잃지 않았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산적한 문제들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치적인 질서의 문란, 끊임없는 내외전쟁에 의한 인명의 대량 살상, 과중한 조세에 따른 생활의 궁핍화, 윤리적 규범의 약화 등으로 어둡게 얼룩져 있던 당시의 현실을 젊은 공자는 지나치거나 무력하게 용납할 수가 없었으며,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생을 몸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세상을 건설하는 방법을 가르치고자 하였고, 점차로 공자의 주변에는 그의 가르침을 배우려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훌륭한 정치지도자로서의 평판을 얻게 되었다. 장주아, “공자의 교육사상 연구”, 경성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7-8쪽.
2. 천하무도
周왕실과 제후들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정치적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동부족을 비롯한 이민족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지배 계층이 급격하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周初에는 소수였던 지배계층이 일부다처제로 인하여 급속하게 팽창하였는데, 지배계층의 과도한 증가는 필연적으로 피지배계급에 대한 가호한 경제적 수탈로 이어졌으며 그에 따른 반발은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지배 계층의 도덕성 상실은 윤리 의식의 약화로 이어져 만사를 오로지 군사적 힘으로 해결하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귀신에게 바치는 엄숙한 종교 의식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계속 희화되었으며 국가 간의 신의는 일상적으로 무시되었다. 鄭의 大夫 子良이, “晉과 楚의 양국은 덕을 닦으려 하지 않고 힘을 다해 싸우고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공격해오는 쪽을 따르기만 하면된다. 진도 초도 신의가 없기 때문에 우리도 신의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 十一年春 楚子伐鄭及 子良曰晉楚不務德 而以兵爭 與其來者可也 晉楚無信 我焉得有信 乃從楚(『春秋左氏傳』 宣公十一年).
라고 말한 것과 초의 관리가, “적보다 유리하면 진군할 따름이다. 맹약을 고려할 필요가 무엇인가?” 敵利則進 何盟之有(『春秋左氏傳宣』 成公十五年).
라고 말한 것에서 춘추기의 사상적 퇴락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춘추시대에 주의 정치적 토대가 되었던 종교 문화와 인문정신이 모두 변질되었기 때문에 사사의 침체가 야기된 것이다. 강제순, “공자 중용사상의 인간학적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19-20쪽.
참고문헌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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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학회 교육사상연구회편(1989), “교육사상가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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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혼란한 시대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질서, 윤리체제 등 전반에 걸쳐 대개혁을 초래하였고, 각 제후는 賢人學者들을 경쟁적으로 우대하여 등용하였으며, 안으로는 부국강병을 실시하고 밖으로는 다른 제후국과의 외교책을 도모하여 오늘날과 같은 국제정치를 방불케 하였다. 이에 따라 학자들의 사상도 변이되었으며, 학문과 인재에 있어서 열국이 주 왕실보다 우수하였던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사회제도를 바로 잡아보겠다고 수많은 사상가가 나타났으니 사상적으로 활짝 핀 제자백가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老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무위자연을 주장하였고, 墨子는 ‘겸애와 평화사상’을 외쳤으며, 法家는 ‘강력한 법에 의한 전제정치’를 주장하였다. 孔子는 述而不作하며 溫故知新하는 보수적인 태도로 전래되어 오는 上帝와 천 사상에 인간을 접목시켜 인간중심의 仁思想을 발전시켰다. 김영재, “공자의 교육사상 연구”,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0, 15-16쪽.
공자는 전통적으로 엄격하면서도 자기 과시적인 衒學者로서 인간이 행동하거나 사고할 때에 따라야 할 엄밀한 규범을 제시한 사람으로 생각되어 오기도 하였다.
물론 그가 살던 당시 윤리적 규범의 약화와 사회질서의 혼란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으며, 윤리적 규범 및 사회질서의 재건을 위해 일생동안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도덕적인 관계망의 확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의무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가 획일적이고 강제적인 규범을 제시한 사람은 아니었다.
공자의 주된 목표가 구질서를 회복시키고 세습적인 귀족정치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고 하여 그를 봉건적 보수주의자라고 단정 짓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任機愈 編, 전원택 譯, 『中國哲學史』, 까치, 1990, 60-75쪽.
『論語』전반에 걸쳐서 나타나 있는 공자의 사상과 그가 일생동안 지향했던 목표를 주의 깊게 따져 볼 때, 그는 전통을 단순히 보전하고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전통을 취사선택하여 발전적으로 계승하려는 개혁적인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공자는 사회의 전체적인 개혁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실현에도 일정하게 기여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위대한 개혁자였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의 사후 수 세기 안에 세습적인 귀족정치는 사실상 중국에서 소멸되었으며, 공자는 그 누구보다도 그러한 변화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젊은 시절 그는 賤職에 가까운 직책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평민들과 그들의 삶에 대해 깊은 관심과 동정심을 갖게 되었으며, 평생 동안 그것을 잃지 않았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산적한 문제들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치적인 질서의 문란, 끊임없는 내외전쟁에 의한 인명의 대량 살상, 과중한 조세에 따른 생활의 궁핍화, 윤리적 규범의 약화 등으로 어둡게 얼룩져 있던 당시의 현실을 젊은 공자는 지나치거나 무력하게 용납할 수가 없었으며,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생을 몸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세상을 건설하는 방법을 가르치고자 하였고, 점차로 공자의 주변에는 그의 가르침을 배우려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훌륭한 정치지도자로서의 평판을 얻게 되었다. 장주아, “공자의 교육사상 연구”, 경성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7-8쪽.
2. 천하무도
周왕실과 제후들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정치적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동부족을 비롯한 이민족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지배 계층이 급격하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周初에는 소수였던 지배계층이 일부다처제로 인하여 급속하게 팽창하였는데, 지배계층의 과도한 증가는 필연적으로 피지배계급에 대한 가호한 경제적 수탈로 이어졌으며 그에 따른 반발은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지배 계층의 도덕성 상실은 윤리 의식의 약화로 이어져 만사를 오로지 군사적 힘으로 해결하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귀신에게 바치는 엄숙한 종교 의식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계속 희화되었으며 국가 간의 신의는 일상적으로 무시되었다. 鄭의 大夫 子良이, “晉과 楚의 양국은 덕을 닦으려 하지 않고 힘을 다해 싸우고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공격해오는 쪽을 따르기만 하면된다. 진도 초도 신의가 없기 때문에 우리도 신의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 十一年春 楚子伐鄭及 子良曰晉楚不務德 而以兵爭 與其來者可也 晉楚無信 我焉得有信 乃從楚(『春秋左氏傳』 宣公十一年).
라고 말한 것과 초의 관리가, “적보다 유리하면 진군할 따름이다. 맹약을 고려할 필요가 무엇인가?” 敵利則進 何盟之有(『春秋左氏傳宣』 成公十五年).
라고 말한 것에서 춘추기의 사상적 퇴락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춘추시대에 주의 정치적 토대가 되었던 종교 문화와 인문정신이 모두 변질되었기 때문에 사사의 침체가 야기된 것이다. 강제순, “공자 중용사상의 인간학적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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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