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정치: 『논어』에서 ‘정치적인 것’의 영역-가족과 연계
Ⅱ. 공자의 생애
Ⅲ. 논어의 내용
Ⅵ. 논어의 여러 판본
Ⅶ. 논어의 주석서
Ⅹ. 논어에 대한 중공의 평가와 인식
참고도서
Ⅱ. 공자의 생애
Ⅲ. 논어의 내용
Ⅵ. 논어의 여러 판본
Ⅶ. 논어의 주석서
Ⅹ. 논어에 대한 중공의 평가와 인식
참고도서
본문내용
인 정화만을 가려 계승하라는 모택동 주석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시를 전제로 할 때, 학자들이 孔子의 사상을 진보적이라 보려 들고 국민들이 孔子를 숭배하는 현상은 중국당국자들의 고민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孔子의 유교사상과 공산주의 사상은 서로 어긋나는 점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산주의 혁명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모조리 해결하기 위하여 발동한 것이 1966년부터 1976년 모택동이 죽기까지 지속되었던 이른바 ‘문화대혁명’ 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무래도 그대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이른 바 봉건적반민주적 요소들을 철저히 뿌리 뽑아야만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孔子나 論語는 두드러진 혁명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54운동(1919) 이후로 일부 인사들 사이에 자기네 전통문화나 孔子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았었고, 그것은 또 공산주의자나 左傾인사들 사이에 더욱 현저했던 형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국의 방침을 따라 전국적인 규모의 운동으로 확산했던 적은 문화대혁명기간을 제외하고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대체로 문화혁명에 있어서의 孔子 비판은 1967년 1월부터 본격화한다. 이때 人民日報에 북경사범대학 紅衛兵組織의 서명아래 앞에 얘기한 ‘전국孔子사상토론회’를 공격하는 글이 두 편이나 실렸던 일은 이해할 만도 하다. 여기에서 馮友蘭呂振羽 등 십여 명의 저명한 학자들이 지명비판되었고, 周楊은 이 회의의 주최자로서 신랄한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孔子비판이 처음부터 어떤 지명 인물과 결부되었다는 것은(人民日報 1967. 1. 10자에도 孔子를 존경하는 자로써 周楊을 공격), 이후 孔子 비판의 성향을 암시하는 듯도 하다. 곧 얼마 안가 1971년 7월 19일자 인민일보에서는 孔丘의 교육사상을 비판한다.는 글에서 孔子비판을 모택동의 정적인 劉 少奇에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같은 해 9월 13일에 모택동과 정권을 다투던 林彪가 죽은 뒤로 孔子 비판은 임표와도 연결되게 된다. 孔子는 고대 노예사회에 있어서 거의 망해 가던 봉건체제를 애써 옹호하며 노예사회를 되살리려던 인물이며, 유소기나 임표는 사회주의혁명을 망치려는 현대의 孔子라는 것이다. 특히 1972년 紅旗잡지 제2기에 廣州의 中山大學교수이던 楊榮國이 춘추전국시대사상영역 안의 두 줄기 노선의 투쟁-유가와 법가의 논쟁으로부터 본 춘추전국시기의 사회변혁이란 논문을 발표한 뒤로, 문화혁명의 일환으로 孔子비판이 제기되었고, 다시 1973년 8월7일자 인민일보에 그가 孔子-완고하게 노예제도를 옹호한 사상가란 글을 발표하면서 批孔은 불붙기 시작하였다. 1973년 8월24일부터 28일에 이르는 동안 ‘제10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직후의 23개월 동안에 인민일보와 紅旗의 두 신문과 잡지에 실린 批孔批林에 관한 글만도 십여 편이 넘는 정도이다. 다시 1973년 12월 3일4일자 光明日報에 실렸던 馮友蘭의 孔子의 비판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나라 과거의 尊孔사상의 자아비판에 대하여란 글과 복고와 반복고는 두 줄기 노선의 투쟁이다.라는 글은, 더욱 孔子를 내치고 진시황을 높여야 한다는 당국의 방침에 따른 고전에 대한 재평가 운동에 불을 붙였다. 이 뒤로 1974년1975년의 批孔批林은 마치 문화대혁명의 사상운동의 일면인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열기가 대단하였다. 1975년 1월 13일부터 17일 사이에 열렸던 ‘제4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에서의 周恩來의 보고에서도 ‘비림비공’은 바로 문혁의 연속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모택동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자 1977년부터는 무조건 孔子를 부정하던 태도가 바뀌어 다시 문혁 이전의 “비판적인 계승을 해야 한다.”는 태도로 바뀌었다. 곧 문혁기간에 호위병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孔子廟도 모두 복구 수리되고, 또다시 孔子를 존중하는 중국인들의 전통은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南京大學 총장인 匡亞明이 1982년 가을에 광명일보에 발표한 孔子에 대한 재연구와 재평가란 글은 그 대표적인 논문의 하나이다. 다시 1983년 4월 21일부터 25일에 이르는 동안 산동성 곡부에서 ‘제3차 전국 孔子사상토론회’가 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180여 명의 학자들이 모여 11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는 陶愚川(곡부사범학원 역사교수)의 孔子의 인물재능학문 및 인재 교육사상, 焦野(중국사회과학원)의 孔子의 대동사상을 논함, 孫開泰(중국사회과학원)의 孔子의 통일사상을 논함 등 孔子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방향의 논문이 다시 크게 눈에 띄었고, 학자들 이외에도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孔子를 존숭해야 한다는 발언을 마구하여 회의 진행이 지장을 받았을 정도였다 한다. 이 반면 孔子의 사상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 발표는 馮天瑜(武漢大學)의 自然知識的 孔子학설을 배척한다.는 논문 정도이고, 대부분은 孔子사상의 적극적인 의의와 소극적인 의의를 아울러 인정하며 현실적으로 어떻게 孔子를 연구해야 되고 어떻게 ‘비판적인 계승’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곧 孔子에 대한 중공의 태도는 다시 문화대혁명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論語도 다시 중요한 과학적인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孔子의 어떤 점이 긍정적인 것이고 어떤 점이 부정적인 것이냐, 따라서 孔子의 사상을 어떻게 계승하고 論語는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전혀 의견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있다. 공산주의 사회에 있어서 ‘문화유산의 비판적인 계승’이란, 말은 그럴 듯하지만 孔子나 論語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유산에 대하여 전혀 해결이 불가능한 명제인지도 모른다.
참고도서
이준구 편저, 공자의 논어: 스승을 만드는 ‘논어 마주보기’, 서울: 무진미디어. 2006.
김용옥 저, 도올 논어1-2, 서울: 통나무, 2000-2001.
정 종 저, 공자와 논어, 이리: 원광대학교출판부, 1986,
김학주, 논어, 서울대출판부, --해제 부분
유교대사전, 성균관대, --‘논어’조
屈萬里, 古籍導讀, 臺灣 開明書局, --논어 해제 부분
중국의 고전 백선, 동아일보사, --‘논어’조
한상갑, 사서집주-논어중용, 세계사상전집1, 삼성출판사 --논어해제부분
이홍진 譯 皮錫瑞 著, 중국경학사, 형설출판사
54운동(1919) 이후로 일부 인사들 사이에 자기네 전통문화나 孔子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았었고, 그것은 또 공산주의자나 左傾인사들 사이에 더욱 현저했던 형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국의 방침을 따라 전국적인 규모의 운동으로 확산했던 적은 문화대혁명기간을 제외하고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대체로 문화혁명에 있어서의 孔子 비판은 1967년 1월부터 본격화한다. 이때 人民日報에 북경사범대학 紅衛兵組織의 서명아래 앞에 얘기한 ‘전국孔子사상토론회’를 공격하는 글이 두 편이나 실렸던 일은 이해할 만도 하다. 여기에서 馮友蘭呂振羽 등 십여 명의 저명한 학자들이 지명비판되었고, 周楊은 이 회의의 주최자로서 신랄한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孔子비판이 처음부터 어떤 지명 인물과 결부되었다는 것은(人民日報 1967. 1. 10자에도 孔子를 존경하는 자로써 周楊을 공격), 이후 孔子 비판의 성향을 암시하는 듯도 하다. 곧 얼마 안가 1971년 7월 19일자 인민일보에서는 孔丘의 교육사상을 비판한다.는 글에서 孔子비판을 모택동의 정적인 劉 少奇에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같은 해 9월 13일에 모택동과 정권을 다투던 林彪가 죽은 뒤로 孔子 비판은 임표와도 연결되게 된다. 孔子는 고대 노예사회에 있어서 거의 망해 가던 봉건체제를 애써 옹호하며 노예사회를 되살리려던 인물이며, 유소기나 임표는 사회주의혁명을 망치려는 현대의 孔子라는 것이다. 특히 1972년 紅旗잡지 제2기에 廣州의 中山大學교수이던 楊榮國이 춘추전국시대사상영역 안의 두 줄기 노선의 투쟁-유가와 법가의 논쟁으로부터 본 춘추전국시기의 사회변혁이란 논문을 발표한 뒤로, 문화혁명의 일환으로 孔子비판이 제기되었고, 다시 1973년 8월7일자 인민일보에 그가 孔子-완고하게 노예제도를 옹호한 사상가란 글을 발표하면서 批孔은 불붙기 시작하였다. 1973년 8월24일부터 28일에 이르는 동안 ‘제10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직후의 23개월 동안에 인민일보와 紅旗의 두 신문과 잡지에 실린 批孔批林에 관한 글만도 십여 편이 넘는 정도이다. 다시 1973년 12월 3일4일자 光明日報에 실렸던 馮友蘭의 孔子의 비판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나라 과거의 尊孔사상의 자아비판에 대하여란 글과 복고와 반복고는 두 줄기 노선의 투쟁이다.라는 글은, 더욱 孔子를 내치고 진시황을 높여야 한다는 당국의 방침에 따른 고전에 대한 재평가 운동에 불을 붙였다. 이 뒤로 1974년1975년의 批孔批林은 마치 문화대혁명의 사상운동의 일면인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열기가 대단하였다. 1975년 1월 13일부터 17일 사이에 열렸던 ‘제4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에서의 周恩來의 보고에서도 ‘비림비공’은 바로 문혁의 연속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모택동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자 1977년부터는 무조건 孔子를 부정하던 태도가 바뀌어 다시 문혁 이전의 “비판적인 계승을 해야 한다.”는 태도로 바뀌었다. 곧 문혁기간에 호위병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孔子廟도 모두 복구 수리되고, 또다시 孔子를 존중하는 중국인들의 전통은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南京大學 총장인 匡亞明이 1982년 가을에 광명일보에 발표한 孔子에 대한 재연구와 재평가란 글은 그 대표적인 논문의 하나이다. 다시 1983년 4월 21일부터 25일에 이르는 동안 산동성 곡부에서 ‘제3차 전국 孔子사상토론회’가 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180여 명의 학자들이 모여 11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는 陶愚川(곡부사범학원 역사교수)의 孔子의 인물재능학문 및 인재 교육사상, 焦野(중국사회과학원)의 孔子의 대동사상을 논함, 孫開泰(중국사회과학원)의 孔子의 통일사상을 논함 등 孔子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방향의 논문이 다시 크게 눈에 띄었고, 학자들 이외에도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孔子를 존숭해야 한다는 발언을 마구하여 회의 진행이 지장을 받았을 정도였다 한다. 이 반면 孔子의 사상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 발표는 馮天瑜(武漢大學)의 自然知識的 孔子학설을 배척한다.는 논문 정도이고, 대부분은 孔子사상의 적극적인 의의와 소극적인 의의를 아울러 인정하며 현실적으로 어떻게 孔子를 연구해야 되고 어떻게 ‘비판적인 계승’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곧 孔子에 대한 중공의 태도는 다시 문화대혁명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論語도 다시 중요한 과학적인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孔子의 어떤 점이 긍정적인 것이고 어떤 점이 부정적인 것이냐, 따라서 孔子의 사상을 어떻게 계승하고 論語는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전혀 의견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있다. 공산주의 사회에 있어서 ‘문화유산의 비판적인 계승’이란, 말은 그럴 듯하지만 孔子나 論語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유산에 대하여 전혀 해결이 불가능한 명제인지도 모른다.
참고도서
이준구 편저, 공자의 논어: 스승을 만드는 ‘논어 마주보기’, 서울: 무진미디어. 2006.
김용옥 저, 도올 논어1-2, 서울: 통나무, 2000-2001.
정 종 저, 공자와 논어, 이리: 원광대학교출판부, 1986,
김학주, 논어, 서울대출판부, --해제 부분
유교대사전, 성균관대, --‘논어’조
屈萬里, 古籍導讀, 臺灣 開明書局, --논어 해제 부분
중국의 고전 백선, 동아일보사, --‘논어’조
한상갑, 사서집주-논어중용, 세계사상전집1, 삼성출판사 --논어해제부분
이홍진 譯 皮錫瑞 著, 중국경학사, 형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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