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박정희
●대통령 이전의 생애
●5·16 군사정변
●제 3공화국
●제 4공화국
●사후 영향력
●평가
●대통령 이전의 생애
●5·16 군사정변
●제 3공화국
●제 4공화국
●사후 영향력
●평가
본문내용
발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의 유공자이며 경제성장을 이룩하지 못한 다른 나라 독재자가 많다는 점과 한국처럼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이나 드물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을 경제성장의 유공자라면 유공자로 볼 수 있으며 민주화 진영이 (그간) 박정희 개인이나 그 시대 경제 분야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한국 경제가 박정희 시대에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에 대해, 그리고 전제적이며 포악했지만 유능하고 그 나름으로 헌신적이었던 ‘주식회사 한국’의 최고경영자(CEO) 박정희에 대해 충분히 인정을 안 해준 것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군사문화와 대대적 환경파괴에 근거한 박정희 시대의 발전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며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국민들로부터는 (민주화 등) 다른 욕구가 나온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적 성공이 그의 권력을 도리어 잠식했다”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객관적인 평과를 강조하였다.
이런 상반된 시각에 대해 박정희를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던 조희연 교수는 직접 경험한 ‘역사적 박정희’와 박정희 신드롬과 같은 현상으로 포착되는 ‘현대적 박정희’의 간극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박정희 시대의 폭압성과 국민적 저항을 강조하는 비판 일색의 기존 담론을 성찰하고 극복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진보 담론이 강조하듯 박정희 체제는 폭압적이었지만, 최근 ‘대중독재론’의 지적처럼 새마을운동의 지지자들이 보여 주는 ‘열광’도 함께 존재한다”며 “미국에 의존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 측면이 존재하고, 경제정책조차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며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지적했다.
한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단지 내에 KIST의 설립자인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 업적에 대한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밝혔다
(2)외국
1999년 8월에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인물 20인」에 오르기도 하였다. 타임은 박정희에 대해 “비록 독재적 성향을 가졌지만 한국의 최장수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경제적 약체 국가를 산업강국으로 변모시켰다고 ” 평가했다. 타임이 선정한 인물들 중에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타고르, 중국의 마오쩌둥과 쑨원, 일본의 히로히토와 모리타 아키오, 싱가포르의 리콴유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베트남의 호치민과 티베트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선정되었다.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 전 수상이 박정희에 대해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와 중국의 덩샤오핑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라고 평가하며 그를 극찬하였으며 독일 정부 국정교과서에서는 박정희를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능력을 가진 국가로 이끌어낸 지도자"로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타 국가들의 경제성장 과정과 비교하여 '기적'으로 평가하였다.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박 대통령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국부를 증진시킨 훌륭한 지도자"라고 평가하였으며 그가 추진한 ‘동방정책’ 또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정책을 벤치마킹한 결과였다고 한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는 2009년 6월, 제주도에서 개최된 한ㆍ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캄보디아 경제발전을 위해 여러 사례를 연구했는데 박 전 대통령 모델을 가장 많이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2004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박정희를 언급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KBS 박권상 사장에게 KBS가 제작한 ‘영상 실록’ 가운데 박정희 편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으며 박정희에 대해 “박 대통령의 평가는 후세가 할 일이지만 그 시대, 그 환경에서는 유신인지 뭔지 그런 길밖에 없었다. 민주화도 무정부적인 민주화는 좋지 않다”며 박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했고 2002년에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을 평양에 초청하여 영화 ‘실미도’의 소재가 된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사죄하며 “한국을 방문하면 박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겠습니다. 그것이 예의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에즈라 보겔(Ezra Vogel)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에 대해 각각 "중화학공업 정책 이후 그가 폭력을 사용하고 나라를 경찰국가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매우 화가 났고 흥분했었다. 하지만 동시에,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큰 발전을 이룩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변화를 가능케 했던 독재적인 리더가 있었다. 1920년대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그랬고, 대만과 한국이 그랬다. 중국은 덩샤오핑 치하에서 발전을 이뤘다. 모두 독재적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다. 먼저 민주화부터 하라는 미국인들의 충고는 성공하지 못했다."며 개발독재의 불가피성을 지적했다.
기미야 다다시는 박정희를 복잡한 과정이 들어있는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로 정리했다. 그는 박정희가 사회주의자인 일부 인물을 경제적으로 미국에서 자립하고 공업화하는 데에 등용했다고 기록했다. 2006년, 후진타오 중국 주석은 당시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전 대표와 면담하며“박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한 새마을운동을 깊이 공부했다”고 발언하였다.
MD 사의 중역으로 일한 데이빗 심프슨은 월남전쟁 당시 청와대를 방문하여 M16 소총의 수입에 대한 결정의 보답으로 박정희에게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안했지만 박정희가 이를 거부하고 그 대신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다시금 M16 소총으로 바꾸어 육군에 지원을 요청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나는 그의 얼굴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이밖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1990년대 초반 레닌그라드대 총장 국제문제 보좌관으로 재직할 당시 국가가 대기업을 키우고 경제발전을 주도했던 한국 경제의 발전 방식에 관심을 보였고 한국 외교관을 통해 “한국어 책이든 외국어 책이든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책을 있는 대로 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반된 시각에 대해 박정희를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던 조희연 교수는 직접 경험한 ‘역사적 박정희’와 박정희 신드롬과 같은 현상으로 포착되는 ‘현대적 박정희’의 간극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박정희 시대의 폭압성과 국민적 저항을 강조하는 비판 일색의 기존 담론을 성찰하고 극복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진보 담론이 강조하듯 박정희 체제는 폭압적이었지만, 최근 ‘대중독재론’의 지적처럼 새마을운동의 지지자들이 보여 주는 ‘열광’도 함께 존재한다”며 “미국에 의존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 측면이 존재하고, 경제정책조차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며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지적했다.
한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단지 내에 KIST의 설립자인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 업적에 대한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밝혔다
(2)외국
1999년 8월에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인물 20인」에 오르기도 하였다. 타임은 박정희에 대해 “비록 독재적 성향을 가졌지만 한국의 최장수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경제적 약체 국가를 산업강국으로 변모시켰다고 ” 평가했다. 타임이 선정한 인물들 중에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타고르, 중국의 마오쩌둥과 쑨원, 일본의 히로히토와 모리타 아키오, 싱가포르의 리콴유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베트남의 호치민과 티베트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선정되었다.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 전 수상이 박정희에 대해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와 중국의 덩샤오핑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라고 평가하며 그를 극찬하였으며 독일 정부 국정교과서에서는 박정희를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능력을 가진 국가로 이끌어낸 지도자"로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타 국가들의 경제성장 과정과 비교하여 '기적'으로 평가하였다.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박 대통령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국부를 증진시킨 훌륭한 지도자"라고 평가하였으며 그가 추진한 ‘동방정책’ 또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정책을 벤치마킹한 결과였다고 한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는 2009년 6월, 제주도에서 개최된 한ㆍ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캄보디아 경제발전을 위해 여러 사례를 연구했는데 박 전 대통령 모델을 가장 많이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2004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박정희를 언급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KBS 박권상 사장에게 KBS가 제작한 ‘영상 실록’ 가운데 박정희 편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으며 박정희에 대해 “박 대통령의 평가는 후세가 할 일이지만 그 시대, 그 환경에서는 유신인지 뭔지 그런 길밖에 없었다. 민주화도 무정부적인 민주화는 좋지 않다”며 박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했고 2002년에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을 평양에 초청하여 영화 ‘실미도’의 소재가 된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사죄하며 “한국을 방문하면 박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겠습니다. 그것이 예의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에즈라 보겔(Ezra Vogel)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에 대해 각각 "중화학공업 정책 이후 그가 폭력을 사용하고 나라를 경찰국가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매우 화가 났고 흥분했었다. 하지만 동시에,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큰 발전을 이룩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변화를 가능케 했던 독재적인 리더가 있었다. 1920년대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그랬고, 대만과 한국이 그랬다. 중국은 덩샤오핑 치하에서 발전을 이뤘다. 모두 독재적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다. 먼저 민주화부터 하라는 미국인들의 충고는 성공하지 못했다."며 개발독재의 불가피성을 지적했다.
기미야 다다시는 박정희를 복잡한 과정이 들어있는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로 정리했다. 그는 박정희가 사회주의자인 일부 인물을 경제적으로 미국에서 자립하고 공업화하는 데에 등용했다고 기록했다. 2006년, 후진타오 중국 주석은 당시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전 대표와 면담하며“박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한 새마을운동을 깊이 공부했다”고 발언하였다.
MD 사의 중역으로 일한 데이빗 심프슨은 월남전쟁 당시 청와대를 방문하여 M16 소총의 수입에 대한 결정의 보답으로 박정희에게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안했지만 박정희가 이를 거부하고 그 대신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다시금 M16 소총으로 바꾸어 육군에 지원을 요청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나는 그의 얼굴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이밖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1990년대 초반 레닌그라드대 총장 국제문제 보좌관으로 재직할 당시 국가가 대기업을 키우고 경제발전을 주도했던 한국 경제의 발전 방식에 관심을 보였고 한국 외교관을 통해 “한국어 책이든 외국어 책이든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책을 있는 대로 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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