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와바로크의 악기와 작곡가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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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수난곡(受難曲)으로 유명해졌다. 1721년 함부르크시 교회음악 감독, 이듬해 함부르크 오페라 감독을 겸임하여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기악곡집 《식탁 음악(1733)》의 예약주문은 전독일뿐 아니라 북유럽·러시아·영국·프랑스로부터 쇄도하였다. 조라우시대 이래 수난곡 46곡·교회칸타타 107곡·오페라 40곡·실내악곡 350곡·협주곡 120곡·관현악곡 140곡 등으로 바흐·G.F. 헨델과 함께 바로크음악을 꽃피웠다. 또한 기지가 풍부한 문필가로 3종의 자서전을 남겼다.
④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 ∼1750]
독일 바로크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오르간 연주자. 아이제나흐 출생. 200여 년에 걸쳐 많은 음악가를 배출한 바흐가문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이다. 서양음악사를 집대성한 위대한 존재이며 우수한 제자를 많이 길러냈기 때문에 후대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세기에는 G.P. 팔레스트리나와 나란히 오랜 음악전통의 상징적 존재로 여겨지면서 모든 음악가의 학습 대상이 되었다. 이미 W.A. 모차르트도 바흐를 연구하여, 《주피터교향곡》 《레퀴엠》을 비롯한 만년의 걸작을 완성했다. L. 베토벤도 소년시절에 스승인 C.G. 네페의 지시로 바흐가 지은 《평균율피아노곡집》을 배우고 <바흐는 작은 강이 아니라 큰 바다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바흐를 존경하였고, 큰 영향을 받았다. 바흐를 결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1802년에 출판된 J.N. 포르켈이 쓴 《바흐전(傳)》과 1829년 20세의 F. 멘델스존에 의해 베를린에서 실시된 《마태 수난곡》의 역사적인 연주에서였다. 더욱이 J. 브람스는 베토벤을 능가하기 위해 창조력의 원천을 바흐에게서 찾았다. 현대음악의 문을 연 A. 쇤베르크가 <12음기법>의 이론적 기초를 바흐의 대위법에서 구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바흐의 작품번호는 오늘날 W. 슈미더가 엮은 《바흐작품주제목록(Bach-Werke-Verzeichnis;BWV, 1958)》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그것에 따른다.
⑤헨델 [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
영국 작곡가. 독일 할레 출생. 어릴 때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9세 때 성 마리아교회 오르가니스트 F.W. 차호브 밑에서 작곡·연주의 기초를 배웠다. 1702년 아버지 희망에 따라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며 캘빈파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그 무렵 G.P. 텔레만과 교유하였다. 1703년 함부르크의 겐제마르쿠트 오페라하우스에서 바이올린·쳄발로 연주자로 실제 경험을 쌓고, J. 마테존과 친교를 맺어 함께 뤼베크로 가서 D.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연주를 들었다. 1705년 오페라 《알미라》를 작곡하여 성공하고, 1906년 오페라의 고향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로마에 도착하자 곧 인기를 끌었으며, 1708년 《부활》 《때와 깨달음의 승리》 등을 상연했고, 1709년 말부터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아그리피나》를 27회나 상연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탈리아 시대에는 A. 코넬리 및 A. 스카를라티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1710년 A. 스테파니 후임으로 하노버궁정 악장이 되어 독일로 돌아갔으나 그 해 휴가를 얻어 런던으로 떠났으며, 1711년 퀸즈시어터에서 상연된 오페라 《리날도》가 대성공을 거두자 영국을 활동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1712년 목가극 《충실한 양치기》, 1713년 《테세오》 등의 오페라가 런던에서 상연되었고, 1717년 7월 17일 조지 1세가 마련한 템스강 음악회에서 《수상(水上) 음악》을 연주하였다. 1719년 오페라 단체 <왕립음악원>을 설립한 뒤 약 10년 동안 창작의 최전성기를 맞았다. 이 무렵 오늘날까지 상연되는 오페라 《라다미스토(1720)》 《오토네(1723)》 《줄리어스 시저(1724)》 《타메를라노(1724)》 《아드메토(1727)》 《리처드 1세(1727)》 등을 작곡하였다. 1727년 조지 2세의 대관식을 위하여 《대관식 앤섬》을 상연하였고, 영국 국적을 얻었다. 그러나 1728년 J. 게이의 대본과 J.C. 페푸슈의 작곡에 의한 《거지 오페라》가 링컨스 인 필즈극장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그의 아카데미는 큰 타격을 받았다. 1729년 아카데미를 재건하고 오페라 《포로(1731)》 등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1733년 경쟁상대인 G. 보논치니의 《귀족 오페라》에 밀려 두번째로 극장문을 닫게 되었다. 1734년 새로 단장한 코벤트가든극장으로 옮겨 《아리오단테(Ariodante, 1735)》 《알치나(Alcina, 1735)》 등의 오페라와 《알렉산드로스의 향연(1736)》 등의 오라토리오 상연으로 경영에 나섰으나, 1737년 건강 악화와 경제파탄이 겹쳐 작곡가 겸 경영자로서의 지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이 무렵 오라토리오 막간에 그의 독주에 의한 오르간 협주곡을 연주하는 습관이 정착되어 인기를 얻어 1738∼1751년까지 오라토리오 작곡에 몰두하였다. 1739년 《구약성서》에 입각한 서사시적 드라마 《사울》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이 초연되고, 1741년 고금의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1742년 4월 13일 더블린에서 초연되어 성공하였고, 1745년에는 오라토리오 《벨샤자르》를 상연하여 영국 중산계급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1749년 4월 27일 아헨의 평화조약 체결을 기념한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이 연주되었다. 1753년 백내장으로 완전히 실명하였지만 계속 지휘와 오르간 연주를 하였고, 조수의 도움으로 작품 개정에 힘썼다. 1759년 4월 14일 런던에서 죽었고 웨스트민스터성당에 묻혔다. 그의 음악은 바로크적 협주양식에 바탕하여 다이내믹하고 간결, 명쾌한 표현으로 호소하는 것이 특징이며, 그 선율은 단음악의 방향을 지향하여 고전적 균형과 간결성을 갖추고 있다. 오페라 46곡, 오라토리오 32곡 등의 대규모 극음악 외에 작품 6의 합주 협주곡, 작품 4 및 7의 오르간 협주곡, 작품 2 및 5의 트리오 소나타, 작품 3의 오보에 협주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종교곡으로는 《챈도스 앤섬》 11곡 외에 유트레히트 및 데팅겐의 전승을 축하하는 《테데움》 등이 있다.

키워드

중세,   바로크,   악기,   작곡가,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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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10.01.25
  • 저작시기2008.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77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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