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정신분석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 프로이트 정신분석, 정신의 구조, 성격의 구조, 성격의 역동성, 방어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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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 프로이트 정신분석, 정신의 구조, 성격의 구조, 성격의 역동성, 방어기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프로이트의 생애

2. 정신의 구조
(1) 의식
(2) 전의식
(3) 무의식

3. 성격의 구조
(1) 원초아
(2) 자아
(3) 초자아

4. 성격의 역동성
(1) 삶의 본능
(2) 죽음의 본능
(3) 불안

5. 방어기제
(1) 억압
(2) 합리화
(3) 반동형성
(4) 투사
(5) 퇴행
(6) 감정전이
(7) 억제
(8) 보상
(9) 치환
(10) 승화
(11) 히스테리
(12) 동일시

6. 성격발달의 5단계
(1) 구강기
(2) 항문기
(3) 남근기
(4) 잠복기
(5) 생식기

7. 외디프스 컴플렉스

8. 리비도와 유아성욕론
(1) 리비도
(2) 유아성욕론

9. 성격의 역동성
(1) 삶의 본능
(2) 죽음의 본능

10. 프로이트 심리성적 이론에 대한 비판적 접근

11. 프로이트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비판

12. 프로이트의 영향

13. 프로이트와 역사학

14. 참고자료

본문내용

이가 많았다. 프로이트는 특히 융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는데, 그로 인해 정신분석회가 유대인들의 모임이라는 비난을 벗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헝가리 의사인 페렌치와 영국 웨일즈의 젊은 신경과 의산인 존스, 그리고 미국인인 브릴 등이 모임에 합류한다. 결국 아이팅곤과 아브라함은 독일의 베를린에 정신분석을 도입하고, 페렌치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그리고 존스와 브릴은 영어권에 처음으로 정신분석적 이론을 소개하게 되었다. 1908년에는 독일의 잘츠부르크에서 최초로 국제 프로이트 심리학 학회가 열리기도 했다.
1909년에 이르자 프로이트는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융과 페렌치를 대동하고 미국으로 강의를 하러 가기도 했다. 또 같은 해에 <국제 정신분석학회지>를 발행하고,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클라크 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수여받았다. 1910년에는 국제정신 분석학회가 구성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국제적인 활동들이 다소 주춤거렸다. 그렇지만 1920년 베를린에 정신분석 연구소가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그 후 런던, 빈, 부다페스트에 연구소들이 속속 들어섰다. 연구소에서는 학생들에게 정신분석을 가르쳤고, 진료비를 낼 수 없는 환자들의 경우 무료로 진료도 해주었다. 또 1931년에는 뉴욕에, 1932년에는 시카고에 각각 연구소가 생겼다.
아주 초창기부터 정신분석가들 사이에는 논쟁과 이견이 있었다. 각자 나름대로의 이론을 발전시키려고 했고, 어떤 학자들은 다른 학자들이 이론에 맞추기 위해 임상 사례를 만들어냈다고 비난하는 일들도 생겨났다. 정신분석학회가 조직되는 방식이나 무의식이라는 개념, 정신분석의 방법론 등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신분석학회에 대한 언론가 기존 학계로부터의 끊임없는 비판이었다.
13. 프로이트와 역사학
역사학과 정신분석이 공동 전선을 편다면 과거의 사실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지리라는 전망을 시사해주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 첫째, 두 학문의 유사성이다. 두 학문은 모두 회의주의적이고 기원과 선례와 반복하는 유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단일한 현상에 대해 다원적인 설명과 증거를 중요시한다. 둘째, 정신분석의 시조인 프로이트는 정신의 작용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면서 역사적인 예술 작품의 분석에 그 이론을 이용하였다. 셋째, 정신분석의 이론이 사회 현상의 설명을 위한 도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이 사변적인 역사철학으로서의 위치를 지니고 있으리라는 가능성에 대해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프로이트는 훌륭한 정신분석가가 되려면 의학과는 다른 학문 분야에도 능통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환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만일 정신분석의 대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면, 분석의 교과 과목은 의사와는 동떨어져 있고 의사의 작업에서 마주치지 않는 학문 분야들을 포괄하게 될 것이다. 그 분야는 문화사, 신화, 종교심리학, 문학 비평 등을 가리킨다. 이들 분야에 대한 훌륭한 소양이 없다면, 분석가는 자신의 자료 대부분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서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Die Frage der Laienanalyse, Studienausgabe, ed. Alexander Mitscherlich et al., 11vols. (Frankfurt am Main, 1975). "Erganzungsband," pp. 336-337.
그러나 정신분석 분야가 사변적인 역사철학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타진했음에 반해 정통 역사학에서는 정신분석 분야를 불신하였다. 구미의 역사학계를 이끌던 역사학의 중진들이 행한 심리사에 대한 공격은 이후 세대 역사가들의 역사학과 정신분석간 교류에 악영향을 끼쳤다. E.H.카는 프로이트에 대해 “무자격의 원시적 합리주의자”라고 평가했으며 한스 울리히 벨러는 정신분석에 대해 “전도유망한 길이라기보다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치부했다. 케네드 S.린은 “심리사가를 자처하는 쓸모없는 사람들의 ‘분별 없는 심리화’는 역사학 전체를 마비시키는 암으로 자라났다.”고 평가했으며 데이비드 해킷 피셔는 “프로이트식 역사 서술의 실패는 어느 정도 정신분석적 방법 자체의 결함에 기인하는 것”이라며 심리사의 본질에 의문을 표시했다. 이 외에도 많은 역사학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정신분석적 역사학의 방법에 비판과 의문을 제시했다.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역사가들의 비판은 최근에서야 해소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각 대학에 심리사(psychohistory) 과정들이 개설되고 있으며 비정신분석적 심리학의 정태적구조적인 한계도 심리사의 등장을 부추겼다.
정신분석의 방법을 역사학에 도입시키려는 시도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첫째, 전기적 측면으로의 확장이다. 영향력 있는 개인을 고찰하고 이를 통해 시대를 고찰하는 방식이다. 둘째, 인종적인 소집단에 대한 연구로의 확장이다. 역사적으로, 어떤 사회의 주류 집단은 그들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어의 기제로 사회 내의 비주류 집단에 대한 가시적 차별을 행해왔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석의 ‘대상 관련 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셋째, 세대나 소집단에 대한 연구로의 확장이다. ‘ 족 로맨스’의 개념을 이용하여 프랑스 혁명을 분석하려 한 린 헌트의 시도는 세대간의 갈등에 적용시킨 심리사의 대표적인 예이다.
오늘날 역사학계를 지배하는 ‘코드’중 하나는 “새로운 문화사”(new cultural history)이다. 심리사는 그 일환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미시사는 심리사와 방법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미시사의 영역으로 들어감으로써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놓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대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사회적 동물임에도 불수하고 사회와 투쟁하는 인간상을 제시함으로써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4. 참고자료
이창재, 프로이트와의 대화, 학지사
노안영/강영신, 성격심리학, 학지사
황재우 역, 프로이드와의 대화, 종로서적
함희준 역, 프로이드 심리학의 기본이론, 배재서관
Davi Staford-Clark, 한권으로 읽는 프로이트,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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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10.02.20
  • 저작시기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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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8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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