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문화교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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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문화와 문화의 만남 1장 ~ 14장까지 요약정리
1. 페르시아 전쟁, 최초의 동서문명 충돌
2. 알렉산드로스와 헬레니즘 그리고 간다라
3. 장건과 반초 그리고 동서교류의 물줄기인 실크로드
4. 흉노와 훈, 고대와 함께 사라지다.
5. 이슬람의 유럽 포위와 한 · 중국에 미친 영향
6. 십자군 전쟁, 암흑의 시대 기지개를 펴다.
7. 아랍, 그리스와 근대 서양의 다리 그리고 동양의 과학기술, 서양을 가다
8. 칭기스칸, 유라시아 네크워크 시대로의 이동 그리고 모험가 마르코 폴로.
9. 정화, 콜럼버스보다 앞선 동양의 대항해가

본문내용

날 제위찬탈 반란인 ‘정난의 변(靖難의 變), 1399~1402)' 정난의 변 - 중국 명(明)나라 초기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내란.
이 터지자 주체의 명으로 4년 동안의 골육상잔의 싸움에 참여하였다. 정화는 이 전쟁에서 연왕을 위해 노력한 공을 인정받았으며, 연왕은 영락제가 된 후 그를 환관의 최고자리인 태감(太監)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의 본성인 마(馬)씨 대신 정(鄭)씨 성을 하사하면서 정화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황제의 대함대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되는 특권까지 누리게 되었다.
조카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영락제는 명대에 대외정책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군주이다. 5차의 몽골친정, 여진정벌, 북경천도, 만리장성의 대대적인 보수는 그의 대외업적을 평가하는 주요한 것들이다. 그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남경에서 북경으로의 천도를 준비하였다. 그는 바다 건너쪽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인 태조와는 달리 칭기스칸의 세계 대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야심찬 군주였으며, 이를 위해 정화의 대원정을 기획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바다로 눈을 돌린 영락제는 조선을 비롯하여 베트남섬라캄보디아자바 등에 사절을 파견하고, 정화를 함대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7차의 대항해를 구상하였다. 1차~3차의 원정은 인도의 캘리컷으로 향하였으며, 4차~6차의 원정은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 해협으로 향했다. 항해일지인 영애승람은 각 항해시의 항해군단을 평균 2만 7천여 명으로 그중 날씨를 관측하는 음양사, 의사, 통역사, 군대, 악대 등 항해와 외교에 필요한 모든 인원들이 탑승하였다고 전한다. 5차 항해 후 정화는 새로운 소식을 접하였는데, 그를 함대 사령관으로 만들고 대항해를 구상한 영락제가 해양원정의 규모를 축소한다는 소식이었다. 6차항해(1421)에서 돌어오던 도중 그를 바다의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던 영락제는 몽골을 직접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65세의 나이로 초원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화 대원정의 목적중에 가장 중요한 목적은 중국대륙과 가장 빈번한 교류를 진행하던 동남아시아 지역과 조공관계를 안정시키고 교역의 범위를 인도양 지역으로 넓혀 조공체제를 확립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또한 영락제는 다른 세계를 정복하기보다 신생 제국인 명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즉 다른 나라에 명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려 한 것이다. 차라리 정복 전쟁을 위해서라면 정예군을 보내면 되겠지만, 위용을 보이려니 당연히 필요 이상으로 많은 선박과 인원이 동원되어야만 했다. 원정대의 규모가 거추장스러워 보일 정도로 커진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에 있다가 정난의 변 시기 행방불명된 조카 건문제(建文帝)를 찾기 위해 대 함대를 구성하였다는 설이 있다.
정화의 항해 이후 중국은 공식적인 조공체제와 형식적인 외교시스템으로 인해 해양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 세계 역사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발견했던 세계는 서서히 기억과 기록에서 사라져 갔다. 정화가 항해를 시작한지 400여 년 뒤, 중국은 서양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불평등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과거 오랫동안 바다를 포기했던 대가를 치루었다.
※끝마치며...
오늘날 인류의 문명은 크게 둘로 나뉜다. 중국, 한국, 일본의 극동을 중심으로 한 동양 문명과,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한 서양 문명이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문명은 상당히 다양한데 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박한다면, 인류학에서와 달리 역사 시각에서 살펴보는 문명은 아무래도 지배 문명, 적어도 오늘날의 역사를 이끌고 있는 문명을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주요한 문명 중의 하나에 속해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가 되겠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두 문명도 점차 하나로 융합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두 문명은 대략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생겨났으며 5000년 정도 별개의 문화, 문명을 이룩해가다가 최근에 이르러 하나로 통합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의 역사중에 어느게 우세할까?“라는 질문의 답에 사실상 동양사는 실패했고 서양사는 성공했다고 대답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서양 문명이 역사적으로 빛을 바랬고 동양은 어느정도는 밝았으나 점점 어두웠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면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은 세계사로 인정되었지만, 그보다 앞선 정화의 원정은 세계사적으로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보다 덜 두드러진 경향을 보인다. 빙하기시대에 이주한 토착민이 이미 살고 그들만의 문명을 발전시켰는데 신대륙이란 말이 과연 맞을까? 이런 단면만 보면 서양의 패권주의 영향이라지만, 현재 동양이 서양의 자본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문 등을 수용하고 있는 이유가 서양문물이 동양보다 우수하고 현실적으로 입증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 문명이 서양 문명보다 뒤지기 시작한 시기는 10~15세기 무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서양이 세계 발견과 정복에 나서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시기에 동,서양 두 문명은 각자 고유한 틀을 완성한다. 동양에선 중국의 송 제국에 이르러 동양식 제국, 즉 유학 체제가 완성된다. 1000년 전의 한 제국시대, 아니 그 전의 1차 분열기(춘추전국 시대) 때부터 꾸준히 발달해온 유학의 이념이 완벽한 현실태로 자리잡은 게 곧 송 제국이었다. 다시 말해 송은 곧 동양식 제국의 정점이었다. 이 정점이 중국의 역대 왕조들 가운데 가장 무력한 체제였다는 사실은 바로 동양 문명의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계사의 양대 산맥중에 하나였던 동양 문명이었던 만큼 앞으로도 나음의 노릇을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실패를 분명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의 가장 초보적인 기능은 바로 교훈에 있다. 실패를 인식하고 거기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동양 문명은 앞으로 주어진 구실마저 잃게 될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권오신외 5, 문화와 문화의 만남』, 강원대학교 출판부, 2005
·남경태, 『트라이앵글 세계사』, 푸른숲, 2001
·Ernst H. Gombrich, 이내금 옮김, 『곰브리치 세계사』, 자작나무, 1997
·강의보조자료(프린트물)
  • 가격2,000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10.02.21
  • 저작시기2007.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8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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