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과 조선인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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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관동대지진이란
1.관동대지진에 대한 정리
1)피해규모
2)피해지역
3)지진과 화재
2.관동대지진의 영향
1)사회적영향
2)경제적영향
3)정치적영향
3.조선인들이 일본에 건너한 이유

II. 트리오의 계략과 비상계엄령 발포
1.당시 일본의 상황
2.(치안)트리오란
3.트리오의 계략
4.계엄령 발포

III. 조작된 유언비어
1.원인
2.유언비어의 전파음모
3.유언비어와 사실

IV. 자경단의 성립과 만행
1.자경단 성립
2.관헌에 의한 학살지령
3.자경단의 활약
4.자경단의 만행
5.자경단 검거
6.자경단 재판

V. 진상규명과 희생양
1.밝혀지는 진상
2.은폐시키기 위한 희생양
3.3대백색테러
4.당시일본정부의 책임회피
5.조선에서의 상황

VI. 관동대학살의 쟁점 3가지
1.계엄령이 발포된 시간은 언제인가
2.유언비어의 근원
3.3대백색테러를 보는 시각

VII. 관동대학살에 대한 국내 및 국제사회의 동향
1.일본동향
2.북한의 동향
3.국내의 동향

본문내용

시작됐다"며 "학살 작전에 동원된 군대와 경찰, 소방단, 청년단 무리들은 손에 총과 칼, 몽둥이를 들고 도처에서 눈에 보이는 조선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했다"고 당시의 참극을 상기시켰다.
중앙방송은 "기나긴 인류 역사의 갈피에는 살인으로 악명을 떨친 자들이 기록돼 있지만 일제와 같이 자연재해를 계기로 수많은 사람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한 살인 악마, 인간백정은 없었다."고 치를 떨었다.
평양방송은 "일제의 조선인 집단학살 만행은 참으로 상상을 초월했다"며 "조선 사람을 10여명씩 묶어 둑에 세워놓고 새로 만든 기관총의 성능을 검사한다고 하면서 쏘아 죽였고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어 밟아 죽이고 참대창을 박아 죽였다"는 등 끔찍한 장면을 고발했다.
이 방송은 당시 일제는 전국적으로 2만3천명의 무고한 조선인을 학살했다면서 "일본 반동들은 우리 인민 앞에 저지른 천추에 용납 못할 범죄행위를 인정하고 사죄해야 하며 응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중앙텔레비전도 근로자와 청년. 학생들이 평양 중앙계급교양관에 전시된 당시 일제의 만행 자료를 보면서 '끓어오르는 민족적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3. 국내의 동향
우리의 역사교과서에서는 95년까지 관동대학살에 대한 내용이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었다. 6차 교육과정에 들어서 역사교과서가 다시 편찬되는 과정에서 관동대학살에 관한 내용이 4줄 정도 언급이 되고 7차 교육과정에서는 7줄 정도로 언급되어있다.
「1923년 일본 관동지방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명과 재산상에 큰 피해를 입어 일본 내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때 일본 당국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을 죽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사회 불안의 원인을 한국인의 탓으로 돌렸다. 이로 인해 재일동포 6000여 명이 일본인에게 학살당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교육부 국사교과서 (하권) 2001년 3월 1일 발행, 편찬자 국사편찬위원회,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
」라고 국사교과서에 짧게나마 언급되어있다. 이렇듯 국내에서의 관동대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 및 연구는 정부나 학계 모두 미약한 실정이다. 물론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이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시기였고, 조선총독부의 통제로 인해 역사적 사료나 증거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무고한 조선인들이 최소한 6000여명이 학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무대응의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5년 6월 22일, 반대시위와 반대운동이 격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일기본조약을 비롯하여 청구권협정, 문화재협정, 어업협정, 재일교포 법적 지위협정 등으로 구성된 한일협정이 양국의 조인을 얻었다. 위의 조약 및 협정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에서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문과 7개 조항으로 구성된 한일기본조약은 일본이 과거 한국을 무력 침략한 사실과 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책임을 밝히고 있지 않다. 또한 청구권협정은 일본이 한국에 유무상의 차관을 제공하는 대신 2차 대전 중 피해를 본 한국 및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갖는 모든 청구권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된다고 규정함으로써 일제통치로부터 받은 민족의 고통을 유, 무상 5억 달러에 매도한 셈이 되었다. 나아가 독도 문제가 애매하게 처리되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지병문 외. 「현대한국정치의 展開와 動學」. 2000. 광명사 pp. 239~249
일제의 과거의 불법적 행위에 대해 5억 달러의 돈으로 상쇄시킨 우리 정부는 이후 일제에 대해 과거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관동에서의 학살 사건은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으로 분석되지만 언제인가 왜곡된 역사와 베일에 감춰진 과거사는 드러나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왜곡된 역사의 베일을 밝혀내는 일에 힘써야 하며 명확하게 밝혀진 이후 양국 국민이 수긍할 수 있고 인정하여 신뢰성 있는 한일 관계로 발전시키고 급선무라 생각한다.
● 참고자료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역사비평사, 2005
한상일, 「日本軍國主義의 형성과정」, 한길사, 1982
강동진, 「日本近代史」, 한길사, 1985
김필동, 「근대 일본의 출발」, 일본어 뱅크, 1999
井上 淸 / 서동만 譯, 「일본의 역사」, 이론과 실천, 1989
한상일, 「日本의 國家主義-韶和維新과 國家改造運動」, 까치글방, 1988
피터 듀스 / 김용덕 譯, 「日本近代史」, 지식산업사, 1999
歷史學會 編, 「일본의 침략정책사연구」, 一潮閣, 1997
카와이 아츠시 / 원지연 譯, 「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중앙 M&B, 2001
김희영, 「이야기 일본사」, 청아출판사, 2001
강만길, 「고쳐쓴 한국 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4
편집부, 「근현대 일본정치사」, 예하미디어, 2003
스즈키 마사유키, 「근대 일본의 천황제」, 이산, 1999
박진우외 공저, 일본 근현대사, 좋은날, 1999
손대준,「일본의 역사와 문화」, 시사 일본어사, 1998
야마다 쇼오지 외 “근현대사 속의 한국과 일본”, 돌베개, 1992
그 외 인터넷 기사 및 한겨레, 동아, 조선일보
인터넷 카페
http://www.dugok.x-y.net/kor-his/eve/goandongjijin.htm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1&article_id=0000448144§ion_id=102&menu_id=102
● 참고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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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상글, 김동수 옮김, 칸토오대진재(關東大震災) 80주년을 맞아 다시 생각해 볼 문제들( 1975년 간 “간토오대진재(關東大震災)”와 2003년 간 “간토오대진재(關東大震災) 학살의 기억”의 회고)
김교화,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이 한,일 관계에 미치는 영향, 건국대학교 행정 대학원 남북한 교류협력학과 2003년
● 참고 사진
-동도대진재과안록(東都大震災過眠錄)
-대 지진때의 조선인 시체
- 흰 띠를 한 자경단의 조선인 살해 장면
  • 가격3,000
  • 페이지수29페이지
  • 등록일2010.02.26
  • 저작시기2007.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85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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