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 * 단군조선사 연구 (한국문화사)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본론
1.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한국사
1) 구석기 시대
2) 신석기 시대
3) 청동기 시대
4) 고조선 사회
5) 철기 시대와 연맹 왕국
2. 세계최초의 국가 신시(神市) 건국사
2-1. 신시(神市) 건국사의 신화적 고찰
3. 신시(神市)의 건국 연대와 문화유적
1) 한반도 · 요서가 동일한 문화권임을 보여주는 흥륭와문화
2) 6000년 전후에 청동기시대를 연 홍산문화
3) 흥륭와 · 홍산문화가 신시 · 단군조선의 문화라는 근거
4. 중국에서 주장하는 망언들의 진실
◆ 기자 동래설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는 은 · 주나라 초기 청동기 유물
◆ 단군조선의 중심지 북경 ‧ 요서지역을 연(燕 )나라 영토로 조작하는 근 거로 오용된 주나라 초기 청동기 유물
◆ 한사군은 어디에 있었는가?

Ⅲ. 마치며

본문내용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 한사군은 어디에 있었는가?
☞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 :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영역에 세웠다는 한의 행정구역인데, 이번 수업을 들으면서 느낀 것 이지만 만분의 일이라도 한사군이 설치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무슨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달달 외루면서 다녔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는 일제가 한국사가 식민지의 역사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본의 지배가 당연할 것이라는 생각을 주입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런 한사군이 이번엔 중국이 동북공정의 도구로 고조선의 영역이 압록강 북쪽을 넘지 못했고, 따라서 고조선 영역에 설치한 한사군의 위치도 한반도 내라는 것이다.
☞ 한사군은 정말 한반도에 있었을까? : 한사군의 수도로서 낙랑군은 가장 논란이 되어 왔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한국인 제자들은 낙랑군이 오늘날 평양지역이라고 주장한다. 대동강 일대에서 출토된 한나라의 유적 유물들이 증거라고 한다. 하지만 이때 출토된 유물들이 고조선이 멸망한 전한 때의 것이 아닌 후한 때의 것 이라는 사실은 무시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고대자료인『사기』에는 낙랑군의 위치를 찾는데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는 갈석산에 대해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창려현 북쪽에 있는데, 창려현은 만리장성의 동쪽 끄트머리인 진황도와 난하 사이에 있는 현이다. 수성현이 창려현으로 변했다는 사료는『수서』에 있다.
이외에도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로를 살펴보면 수양제가 정해준 각 군의 진격로에 한사군이 나온다. 수양제는 한사군의 이름의 각 군에게 낙랑, 현도, 임둔, 대방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하라고 하였는데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면 수양제의 이 말은 앞뒤가 맞지 않으며 한사군의 이름 외에도 부여도, 요동도, 조선도등의 24군이 있었다.
여기에서도 다른 무엇보다 더 황당한 건 중국 사료에도 만리장성의 기점이 나와 있는데 한국 학자에 의해 만리장성의 기점이 황해도까지 이어져 한반도 내륙까지 뻗쳐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나도 부끄럽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한국 학자가 주장했다는 내용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 낙랑군과 낙랑국? :『후한서』에 보면〔낙랑은 군이며,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낙랑군(君)이 요동 지역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기록이다. 그런데 한국사에는 낙랑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또 다른 정치 세력인 낙랑국(國)이 있었다. 이것은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문제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고 넘어가야 한다.
『삼국사기』에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동왕자를 낙랑왕 최리가 보고 북국왕의 아들이라고 데려가 사위 삼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낙랑왕이라고 표현한 점을 보면 낙랑군과는 별도의 세력임을 알 수 있다.
또한『삼국사기』에는〔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탈취해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여기서 후한 광무제가 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다. 만약 낙랑군이라면 광무제 자신이 자신의 군현을 공격했다는 말이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자신의 군현을 공격해서 다시 군현을 만드는 왕이 존재할까?
Ⅲ. 마치며
“인도의 동서남북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한 사람의 거지나 도둑을 보지 못했다. 인도의 부를 확인하고 인도 사람들의 높은 도덕적 가치관과 지혜를 보고 나서 이 나라는 지배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것을 느꼈다. 그 나라의 척추, 즉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을 파괴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전통적 교육제도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을 제안한다. 외국 문화와 영어가 인도인들의 문화와 언어보다 훌륭하다고 강조해서 교육을 시킬 때, 그들이 스스로 자기 문화유산에 대해서 자신감을 잃어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진실한 지배 국가가 될 것이다.”
Lord McCauley, 영국 국회의 연설 중에서.. 1835년 2월 2일
위의 내용은 인도를 식민 통치하기 위하여 영국의 주요 간부가 내놓은 계획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뿌리 깊은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을 파괴하기 위해 영국은 인도의 문화와 언어는 열등하고 영국의 문화와 언어가 우수하다고 교육을 시키자는 내용이다.
비단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유구한 역사와 그에 따른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알 수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 역사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식민사관은 단군조선은 없었고 위만조선만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사를 식민지 상태로 출발한 것으로 왜곡하려 하고, 중국 동북공정은 단군조선은 없었고 기자 위만조선만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고조선사는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가 된다면서 우리 뿌리 자체를 부정한다. 이 중 무엇 하나 진실을 드러낸 것이 없고 모두 왜곡 되어 있다.
사실을 기록한 역사는 없고, 어떤 사건이라도 그 글을 쓰는 작가의 머리와 손을 거치면 왜곡이 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과거 기록들 또한 그 역사가가 그 시대 상황을 본 것을 쓴 것이지 그대로의 사실은 아니다. 현재의 몇몇 역사가들 또한 자기의 이익에 맞춰 역사를 입맛에 맞게 쓰고 있지 않은가? 왜곡된 한국사의 기록 중 한국인이 조작해 놓은 사실이 얼마나 많은가만 봐도 알 수 있는 문제이다. 물론 정확히 기록해 놓은 역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왜곡된 역사적 기록만을 가지고 문제 삼고 있는 국내 외적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왜곡된 사실들 속에 묻혀서 살아가면서 세상엔 믿을 것이 없다고만 생각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은 끊어 버린 채, 개인적인 이기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동일한 사건을 보고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감대라는 것이 형성되고 연대감을 가지게 되는 건 분명 우리가 같은 역사를 겪어온 민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독도관련 망언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온 국민이 느끼는 분노가 바로 그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일본과 중국에서 우리의 역사에 대해 망언 할 수 없도록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 나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0.03.02
  • 저작시기2007.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8650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