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징으로 배의 이물로 부터 고물까지 배 전체에 선루를 만드는것으로 단순히 상장이라고도 한다.
상장 위에는 양현과 이물에 여장을 설치하였다. 상장의 패란위에 뱃집멍에를 걸고 여기에도 포판을 까는데 이는 청판(廳板)이라고 한다. 따라서 판옥선은 갑판이 두개인 2층 갑판선이 된다. 청판에는 두개의 돛대(이물돛대,한판돛대)를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게한다. 3층은 청판위의 누각을 말하는데 여기가 현대함선의 함교에 해당한다. 통제사나 수사가 이곳 누각에서 지휘를 하게 되며 장대(將臺)라고 부른다. 또한 청판에는 기를 올리는 깃대도 있다.
그밖에 특징
강강술래는 임진왜란때 적의 군사에게 해안을 경비하는 우리 군세의 규모를 많게 보이기 위하여, 또 왜군이 우리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특히 전자 부근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수십명이 떼를 지어, 해안지대 산에 올라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돌면서 ‘강강술래’ 라는 노래를 부르게 한데서 비롯되었다.
1966년 2월 15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해마다 음력 8월 한가윗날 밤에, 곱게 단장한 부녀자들이 수십 명씩 일정한 장소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원형으로 늘어서서,‘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노는 놀이이다. 강강술래를 할 때는 목청이 좋은 여자 한 사람이 가운데 서서 앞소리[先唱]를 부르면, 놀이를 하는 일동은 뒷소리[合唱]로 후렴을 부르며 춤을 춘다.
유래는 임진왜란 때, 당시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인 이순신(李舜臣)이 수병을 거느리고 왜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적의 군사에게 해안을 경비하는 우리 군세의 많음을 보이기 위하여, 또 왜군이 우리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특히 전지(戰地) 부근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수십 명씩 떼를 지어, 해안지대 산에 올라,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돌면서 ‘강강술래’라는 노래를 부르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뒤 그곳 해안 부근의 부녀자들이 당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연례 행사로서 ‘강강술래’ 노래를 부르며 놀던 것이 전라도 일대에 퍼져 전라도 지방 특유의 여성 민속놀이가 되었다.
‘강강술래’라는 말은 한자의 ‘强羌水越來’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강강’의 ‘강’은 주위 ·원(圓)이란 뜻의 전라도 방언이고, ‘술래’는 한자어로 된 ‘巡邏(순라)’에서 온 말로서 ‘경계하라’는 뜻이니, 이는 ‘주위를 경계하라’는 당시의 구호인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주위의 뜻인 ‘강’이 둘 겹친 것은 특히 주위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술래’가 ‘수월래’로 들리며, 그렇게 기록되기 쉬운 것은, 진양조(晋陽調 또는 진양)로 길게 뽑을 때 ‘수월래’로 들리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표기는 ‘강강술래’라고 하는 것이 옳다.
결론
각 나라마다 조국의 영웅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영웅들이 있다. 광개토대왕, 왕건, 세종대왕, 안중근 의사등 여러 인물이 있지만 그중에서 임진왜란의 흐름을 완전히 바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있다. 이런 글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넣는다는 것은 좋진 못하지만, 내가 뽑는 최고의 '영웅' 의 한 사람이며 이순신과 비교할 만한 인물은 다섯손가락 이내라고 말하고 싶다.
흔히들 이순신이 단순히 바다에서 왜군을 대파한 인물로 안다. 물론 한국사람들이 꼽는 최고의 영웅중에 한 사람이지만, 이번에 쓰는 글로 단순히 바다에서 왜군을 격파한 장수가 아닌 임진왜란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업적과 전투에 대한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손자병법 허실편에 '공기소필구' 라는 말이 있다. 공격을 하되 적이 반드시 구하지 않으면 안될 곳을 택한다는 뜻인데, 즉 적의 중심을 택하여 치명타를 주어 전세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이순신은 왜선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울돌목 지역을 택하였고 철저히 이를 격파함으로써 왜의 육군에 대한 보습선을 잘라 왜군 전세와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했다.
소수로써 다수를 상대하여 승리한 예가 몇몇 있지만, 무려 10 : 1 이상의 전력차이로 승리한 예는 드물다. 클라우제비츠는 "가장 좋은 전략은 우선은 전체적으로, 그 다음은 결정적 지점에서 언제나 매우 강력한 것 이다."고 했고, 슐리펜은 "만약 전체를 공격하기에 너무 열세라면 결정적인 한 부분을 집중고격해야 승리할 수 있다." 고 했다.
이순신은 먼저 적의 결정적인 지점으로 집주공격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했다. 소수로써 다수를 이기는 것은 대단히 희박한 승산이었다.
명랑해전 말고도 그의 업적과 전략,전술에 관해 칭찬할 것은 한두 개가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해군사에서 이순신은의 업적은 크게 인정받고 있다.
이순신의 해전사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후 많은 전략·전술가들이 그의 위업에 최상급의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영국의 해군 중장 밸러드(G.A. Ballad)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한다. 밸러드는 그의 저서에서 한산해전을 평가하여 말하기를
“이 해전으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던 야망은 급속히 끝을 맺었다. 이것은 위대한 조선의 제독이 세운 빛나는 전공 때문이었다.불과 6주간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는 전 세계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연전연승의 전공을 세웠다.그는 적의 전투함대를 여지없이 파멸시켰고, 적의 병참을 차단하고, 적의 수송선단을 소탕하여 육전에서 이기고 있는 적 지상군의 태세를 위태롭게 만들었으며, 적의 야심에 찬 계획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넬슨(Nelson), 블레이크(Blake)라 할지라도 자주 잔혹한 외국의 압제를 받아왔던 아주 조그마한 나라에서 태어난 그리고 외국에는 전혀 알려 져 있지 않은 이 지휘관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이순신 제독이 그의 조국 밖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실로 유감된 일이다" 라고 이순신을 세계해전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제독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명란해전의 전략이나 이순신의 지휘자로서 위상은 우리나라 보다 서양에서 더 많은 인식을 하고 있다. 이번에 진도를 다녀오면서 그 동안 임진왜란이나 명랑해전을 대수롭지 않은 역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번 조살ㄹ 통하여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서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상장 위에는 양현과 이물에 여장을 설치하였다. 상장의 패란위에 뱃집멍에를 걸고 여기에도 포판을 까는데 이는 청판(廳板)이라고 한다. 따라서 판옥선은 갑판이 두개인 2층 갑판선이 된다. 청판에는 두개의 돛대(이물돛대,한판돛대)를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게한다. 3층은 청판위의 누각을 말하는데 여기가 현대함선의 함교에 해당한다. 통제사나 수사가 이곳 누각에서 지휘를 하게 되며 장대(將臺)라고 부른다. 또한 청판에는 기를 올리는 깃대도 있다.
그밖에 특징
강강술래는 임진왜란때 적의 군사에게 해안을 경비하는 우리 군세의 규모를 많게 보이기 위하여, 또 왜군이 우리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특히 전자 부근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수십명이 떼를 지어, 해안지대 산에 올라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돌면서 ‘강강술래’ 라는 노래를 부르게 한데서 비롯되었다.
1966년 2월 15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해마다 음력 8월 한가윗날 밤에, 곱게 단장한 부녀자들이 수십 명씩 일정한 장소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원형으로 늘어서서,‘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노는 놀이이다. 강강술래를 할 때는 목청이 좋은 여자 한 사람이 가운데 서서 앞소리[先唱]를 부르면, 놀이를 하는 일동은 뒷소리[合唱]로 후렴을 부르며 춤을 춘다.
유래는 임진왜란 때, 당시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인 이순신(李舜臣)이 수병을 거느리고 왜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적의 군사에게 해안을 경비하는 우리 군세의 많음을 보이기 위하여, 또 왜군이 우리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특히 전지(戰地) 부근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수십 명씩 떼를 지어, 해안지대 산에 올라,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돌면서 ‘강강술래’라는 노래를 부르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뒤 그곳 해안 부근의 부녀자들이 당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연례 행사로서 ‘강강술래’ 노래를 부르며 놀던 것이 전라도 일대에 퍼져 전라도 지방 특유의 여성 민속놀이가 되었다.
‘강강술래’라는 말은 한자의 ‘强羌水越來’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강강’의 ‘강’은 주위 ·원(圓)이란 뜻의 전라도 방언이고, ‘술래’는 한자어로 된 ‘巡邏(순라)’에서 온 말로서 ‘경계하라’는 뜻이니, 이는 ‘주위를 경계하라’는 당시의 구호인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주위의 뜻인 ‘강’이 둘 겹친 것은 특히 주위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술래’가 ‘수월래’로 들리며, 그렇게 기록되기 쉬운 것은, 진양조(晋陽調 또는 진양)로 길게 뽑을 때 ‘수월래’로 들리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표기는 ‘강강술래’라고 하는 것이 옳다.
결론
각 나라마다 조국의 영웅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영웅들이 있다. 광개토대왕, 왕건, 세종대왕, 안중근 의사등 여러 인물이 있지만 그중에서 임진왜란의 흐름을 완전히 바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있다. 이런 글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넣는다는 것은 좋진 못하지만, 내가 뽑는 최고의 '영웅' 의 한 사람이며 이순신과 비교할 만한 인물은 다섯손가락 이내라고 말하고 싶다.
흔히들 이순신이 단순히 바다에서 왜군을 대파한 인물로 안다. 물론 한국사람들이 꼽는 최고의 영웅중에 한 사람이지만, 이번에 쓰는 글로 단순히 바다에서 왜군을 격파한 장수가 아닌 임진왜란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업적과 전투에 대한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손자병법 허실편에 '공기소필구' 라는 말이 있다. 공격을 하되 적이 반드시 구하지 않으면 안될 곳을 택한다는 뜻인데, 즉 적의 중심을 택하여 치명타를 주어 전세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이순신은 왜선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울돌목 지역을 택하였고 철저히 이를 격파함으로써 왜의 육군에 대한 보습선을 잘라 왜군 전세와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했다.
소수로써 다수를 상대하여 승리한 예가 몇몇 있지만, 무려 10 : 1 이상의 전력차이로 승리한 예는 드물다. 클라우제비츠는 "가장 좋은 전략은 우선은 전체적으로, 그 다음은 결정적 지점에서 언제나 매우 강력한 것 이다."고 했고, 슐리펜은 "만약 전체를 공격하기에 너무 열세라면 결정적인 한 부분을 집중고격해야 승리할 수 있다." 고 했다.
이순신은 먼저 적의 결정적인 지점으로 집주공격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했다. 소수로써 다수를 이기는 것은 대단히 희박한 승산이었다.
명랑해전 말고도 그의 업적과 전략,전술에 관해 칭찬할 것은 한두 개가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해군사에서 이순신은의 업적은 크게 인정받고 있다.
이순신의 해전사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후 많은 전략·전술가들이 그의 위업에 최상급의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영국의 해군 중장 밸러드(G.A. Ballad)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한다. 밸러드는 그의 저서에서 한산해전을 평가하여 말하기를
“이 해전으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던 야망은 급속히 끝을 맺었다. 이것은 위대한 조선의 제독이 세운 빛나는 전공 때문이었다.불과 6주간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는 전 세계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연전연승의 전공을 세웠다.그는 적의 전투함대를 여지없이 파멸시켰고, 적의 병참을 차단하고, 적의 수송선단을 소탕하여 육전에서 이기고 있는 적 지상군의 태세를 위태롭게 만들었으며, 적의 야심에 찬 계획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넬슨(Nelson), 블레이크(Blake)라 할지라도 자주 잔혹한 외국의 압제를 받아왔던 아주 조그마한 나라에서 태어난 그리고 외국에는 전혀 알려 져 있지 않은 이 지휘관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이순신 제독이 그의 조국 밖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실로 유감된 일이다" 라고 이순신을 세계해전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제독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명란해전의 전략이나 이순신의 지휘자로서 위상은 우리나라 보다 서양에서 더 많은 인식을 하고 있다. 이번에 진도를 다녀오면서 그 동안 임진왜란이나 명랑해전을 대수롭지 않은 역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번 조살ㄹ 통하여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서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