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아편전쟁 이후 5.4운동 이전까지 중국현대 역사상 발생한 사건(신해혁명)의 설명과 느낌 및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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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현대사]아편전쟁 이후 5.4운동 이전까지 중국현대 역사상 발생한 사건(신해혁명)의 설명과 느낌 및 평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5.4 운동의 배경과 요인
2. 신해혁명이란?
3. 신해혁명과 5.4운동
4.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역사적 배경과 원인
1) 신해혁명의 배경
2) 청조 말기 민중의 저항과 열강의 침략
3) 회생을 위한 자구책과 실패
5. 신해혁명의 전개
6. 신해혁명의 과정
7. 위안스카이의 등장과 혁명의 끝

Ⅲ. 결론(느낌 및 평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에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하여 베이징[北京]정부를 조직하였다. 즉,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퇴위를 실현시켰고,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宣統帝]는 퇴위조를 내림으로써 268년에 걸친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다음날 쑨원은 사직했고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쑨원은 사직의 조건으로 난징에 임시정부를 설치할 것을 내세워 위안스카이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2월말에 베이징 등지에서 일어난 병변(兵變)을 구실로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3월 10일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4월 1일 쑨원은 정식으로 임시대총통직에서 해제되었고, 5일 참의원(參議院)이 베이징으로 이전을 결의했다. 이로써 혁명파의 위안스카이 견제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7. 위안스카이의 등장과 혁명의 끝
위안스카이에게 정권을 위양(委讓)한 후, 쑨원 등 혁명파의 급진분자는 재야의 입장에서 실업진흥과 사회개혁을 추진하였고, 쑹자오런[宋敎仁(송교인)] 등의 온건분자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다수정당의 수립과 내각책임제의 실현에 힘썼지만, 중화민국 초기의 중앙정국은 정당정치를 둘러싼 항쟁이 전개되어 갔다. 입헌공화제를 원칙으로 한 중화민국의 발족에 따른 정당난립 속에서 쑹자오런 등은 중국동맹회를 개조(改組)하여 공개정당으로 만들고, 소당파(小黨派)를 합쳐 국민당을 만들어 정당정치의 실현을 꾀하였다. 1913년 1∼2월에 실시된 국회선거에서 국민당이 승리하자, 위기감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열강과 입헌파의 지지를 받아 국민당에 무력탄압을 가하고 쑹자오런 암살사건을 일으켜 제2혁명에 성공하였다. 혁명파를 누른 위안스카이는 제제운동(帝制運動)을 추진하는 한편, 일본의 대(對)중국 21개조의 요구를 수락하였기 때문에 제3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은 위안스카이의 죽음과 함께 끝나기는 했으나, 이로 인해 중국은 군벌혼전상태에 빠졌고, 신해혁명은 완전하지 못한 상태로 끝을 맺었다.
Ⅲ. 결론(느낌 및 평가)
신해혁명은 자본주의의 발전기에 발발했던 점, 부르조아와 부르조아의 혁명파가 혁명을 지도하는 단계까지 성장했던 점, 그리고 그 지도 강령 중에는 만주 공화국의 수립을 지향했던 점과 함께 자본주의로의 광활한 발전을 약속한 지권평등, 즉 토지 국유를 내포하고 있는 점에서 일단 부르조아 혁명을 지향하는 것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첫째, 청조 귀족의 비민주적인 지배를 타파하여 중국 민중을 2천년 이래의 전제주의적인 봉건 체제에서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열강이 어떻게 해서든지 帝政을 잔존시키겠다는 음모를 분쇄하여 다시는 부활을 허용하지 않는 거점을 만들었다. 둘째, 아시아 최초의 부르조아 공화국을 수립하여, 중국 민중의 마음에 깊이 인종 평등, 인권 존중, 여성 해방 등의 민족주의 사상을 심어주어, 그 후 봉건 군벌도 쉽사리 손을 내밀어 못하도록 하였다. 셋째,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해방 투쟁에 적지 않은 자극을 주어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 민족운동을 전개시키도록 함으로서 구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뿌리에서 동요시키는 등 몇 가지의 공헌을 바였다. 바꾸어 말하면 신해혁명은 그 후 30년간에 걸친 중국 및 아시아 민중의 반제국(반식민지적 종속체제의 타파와 독립, 자주적인 국가체제의 수립)?반봉건(대중적 기반 위에 선 근대적, 민주주의적 사회경제체제와 가치구조의 창출) 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달성하였던 것이다.
신해혁명의 최대의 성과라고 일컬어지는 2천년 이래의 전제지배체제의 타도와 민주공화제의 수립이나 거기에 수반된 새로운 정신적?사상적 해방은 비록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신해혁명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다. 그것은 신해혁명의 혁명적 성격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로서 ‘신해혁명에 의한 청조타도와 공화제정부의 수립이 과연 사회구조의 변화에 혁명성을 부여할 수 있을 정도의 변혁을 가져왔는가’라는 데 초점이 놓여지고 있다. 이리하여 신해혁명은 혁명이라고 볼 수 없다는 부정적 시각이 있다. 이들은 신해혁명은 반식민지, 반봉건적 여러 세력들이 사회의 기본 틀을 변경함이 없이 부르조아적 요소를 위로부터 포섭함으로써 봉건적 지배의 재편을 꾀하는 단순한 정치적 변혁이라는 것이다. 신해혁명은 청말 이래의 신사층이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일으킨 단순한 정권 교체적 정변으로 규정한 견해도 있다.
이와는 달리 신해혁명의 혁명성을 강하게 긍정하는 주장에 의하면 이 운동은 우선 농민을 주력군으로 하는 인민과 반종집단(제국주의?봉건주의)과의 투쟁에서 찾고 있다. 신해혁명 전개과정의 기본 축은 바로 농민투쟁이며 이것이 혁명의 기본적 동력으로 발전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수립이란 의미를 강조하는 혁명론자들도 구질서가 그대로 존속되고 또한 봉건체제는 군벌의 영수인 원세개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공화제 정권은 청조보다 더 심한 매판적 봉건세력이라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해혁명의 역사적 성격은 신해혁명이 이루어 놓은 현상보다는 반제.반봉건이라고 하는 세계사 전개의 출발점이 되었다는데 그 의미를 높게 평가할 수 있겠다. 이러한 평가는 바로 辛亥年(1911)의 변혁 그 자체보다는 신해년 이후의 역사적 指向性을 중시하는데 의미가 있고, 이는 다음에 오는 5.4운동의 전 단계로 평가할 때 그 역사적 성격이 더욱 뚜렷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볼 째에 신해혁명은 이후에 전개되는 민국(공화제 국가)을 건설하고 민국의 앞날에 새로운 方向性을 제시했다는 뜻에서 민국혁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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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두기, 『중국의 共和革命』, 지식산업사, 1999
김희교 역, 『현대중국을 찾아서 1』, 도서출판 이산, 2001
박종현 역, 『중화민국사』, 신서원, 1997
김형종,「신해혁명의 전개」,『강좌중국사Ⅵ』, 지식산업사, 2005
김형종,「신해혁명의 전개」,『강좌중국사Ⅵ』, 지식산업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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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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