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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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중국역사 개관
1) 왕조의 변천

2) 고대사
(1) 전설의 국가
(2)은·주시대
(3) 춘추·전국시대
(4) 진(秦)나라 시대
(5) 전한시대
(6) 후한시대

3) 중세사
(1) 삼국시대
(2) 서진 시대
(3) 동진·오호 십육국 시대
(4) 남·북조 시대
(5) 수 나라
(6) 당나라 시대

4) 근세사
(1) 송나라 시대
(2) 원 시대
(3) 명나라 시대
(4) 청나라

5) 현대사
(1) 중화민국(中華民國)

본문내용

는 몽골의 잔존 세력을 완전 섬멸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몽골에 친정하였고, 鄭和로 하여금 대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일대와 인도양 일대를 활약하여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 영락제는 1421년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으며 《영락대전》을 편찬하였다.
영종 때에는 환관 왕진의 발호로 국정이 문란하였고 몽골 오이라트부의 침입으로 '토목의 변'에서 영종이 포로로 잡혀가는 치욕을 겪었다. 헌종 성화제와 효종 홍치제의 치세를 명나라의 안정시기로 일컬어진다. 그 후 정덕제가 즉위하자 다시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부패하였고, 특히 천계제 때의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횡포는 극에 달하였다.
신종 만력제가 즉위하면서부터 동북쪽에서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그 세력을 확장하더니 끝내 중국을 침범하게 되었고 이에 따른 백성들의 과중한 세 부담과 심한 기근으로 농민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게 되었다. 농민 반란 가운데 특히 이자성은 그 세력이 왕성하여 마침내 북경성을 점령하자 숭정제가 자결함으로써 명나라는 17대 277년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자성은 북경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되어 산해관 총병 오삼계(吳三桂)의 반민족 행위로 인해 북경에서 쫓겨나고 만주족인 청나라가 마침내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4) 청나라
오삼계의 반민족적 행위로 난공불락의 산해관에 무혈 입성한 예친왕은 손쉽게 북경에 들어가 이자성을 몰아내고 淸왕조가 명나라의 뒤를 승계한 중국의 정통 왕조임을 선언하였다.
1644년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후 제 4대 강희제 때에는 명의 유신들이 세운 남명 정권을 완전 소탕하고 오삼계 등 삼번(三藩)의 난을 평정하였다. 또 러시아의 침공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써 제지하고 외몽골·회부 등을 병합하는 한편 대만의 정씨 정권을 평정함으로써 중국 지배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강희제로부터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에 이르는 1백 년 동안은 청의 전성기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기간에 청의 영토가 현저히 확대되었음은 물론 군주권이 강화되고 여러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국가 재정이 충실하였다.
청나라는 원나라와 같이 이민족으로서 중국을 지배한 민족이었으나 한족 지배 정책에 있어서는 그 궤를 달리하였다. 원나라가 철두철미하게 몽골 민족만을 우대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여 정치상의 결정권을 모두 몽골 민족이 장악한 데 반하여 청나라는 만주족과 한족이 협동으로 정치를 수행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청나라의 전성기인 강희·옹정·건륭의 시대를 거치면서 창업 당시의 청신했던 기풍이 점점 사라지고 사치 풍조에 젖어 들면서 정치가 부패하고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특히 군의 근간을 이루었던 팔기군이 부패해지면서 백련교의 난이 일어나 국내의 정정이 불안한 가운데 1840년에 있었던 아편전쟁에서의 패배는 거대한 중국의 무력함을 드러내었다.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청조는 더욱 궁지에 빠졌으며 1856년에 일어난 애로우호 사건으로 영·불군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더욱 중국의 무력함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1864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겨우 평온을 되찾아 동치 중흥을 꾀했으나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좌절되고 열강의 중국 진출이 현저해져 중국 요지에 대한 조차와 할양 등으로 중국 전토는 열강들에게 잠식되기에 이르렀다.
1900년에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 열강의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청조는 입헌정치의 준비를 서둘렀으나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에 선통제가 퇴위함으로써 청조는 막을 내렸다.
문화적으로는 강희제 시대의 《강희자전》과 건륭제 시대의 《사고전서》 등 대편찬 사업이 이루어졌으며 고증학이 발달하였다.
5) 현대사
(1) 중화민국(中華民國)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1912년 1월 손문의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하는 中華民國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북양군벌을 배경으로 당시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원세개의 독재와 집권욕 때문에 민주주의 건설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대국적인 시세를 판단한 손문은 한때 원세개에게 대총통의 자리를 물려주자 원세개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 황제 제도의 부활을 꾀하는 등 정권욕을 채우려다가 실패하였고 1917년에는 장훈이 선통제(청조의 마지막 황제)의 복위를 꽤했다가 실패하였다.
그후 단기서·오패부·장작림·풍옥상 등의 군벌이 권력다툼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 틈을 노린 일본은 독일이 소유했던 산동반도의 권익을 승계하는 한편 중국에 대하여 21개조 요구 사항을 승인하도록 강요하였고 군벌 단기서와 결탁함으로써 중국 진출에 성공하였다.
1923년 이후 세계 열강들은 다투어 중국에서의 이권 쟁탈에 주력하였고 이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지식인·학생·노동자들은 외세 배척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1919년의 5·4운동과 1925년의 5·30사건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1924년 국민당 제 1회 전국 대표 대회가 열려 제 1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였고, 1925년 손문이 죽은 후 국민당은 광동에 국민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다음해인 1926년 북벌을 개시하여 상해·남경을 점령하였다. 북벌군 사령관 장개석은 上海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남경 정부를 수립하여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손을 잡은 무한정부와 대립하였으나 얼마 후 무한 정부도 공산당과 결별하고 남경정부와 합류하였다. 그후 북벌이 재개되고 1928년 장작림이 봉천에서 폭살되자 중국 전토가 국민당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남경을 수도로 하는 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국민정부는 9·18사건(만주사변) 이래 일본의 침략에 무저항주의를 택하고 오로지 공산당 타도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폈으나 서안사건을 계기로 제 2 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국공간의 반목이 일어나고 태평양 전쟁 종결과 함께 국공합작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국공 양측은 미국 특사의 중재로 정치 협상 회의를 열어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였으나 결국 국공내전으로 번져 국민당 세력은 대만으로 이동하고 공산당은 1949년 10월 모택동을 주석으로 하는 中華人民共和國을 수립하였다.
대만으로 이동한 국민당 정부는 5권 분립주의 아래 산업과 경제를 발전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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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3.24
  • 저작시기20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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