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니체의 생애
1. 니체의 작품
2.『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개관
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문체와 구성
4. 나의 감상
1. 니체의 작품
2.『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개관
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문체와 구성
4. 나의 감상
본문내용
떤 판단이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니체-되기'를 주장하던 그의 전작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과 비교했을 때 필자가 느끼는 인식 때문에 그렇다.
지은이는 <차라투스트라>를, 스스로 고통과 치유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니체를 창조해가는 니체의 정점에 있는 책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이 과정을 이 책의 제 1부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보통의 책에서라면 저자의 전기 부분에 해당하거나 특정한 저작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다소 독특하게 묘사되고 있다.
'생의 결핍 때문에 겪는 고통이 아니라 생의 과잉 때문에 겪는 고통'이라는 니체의 말로 압축되는 <차라투스트라>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니체의 그 어떤 전기보다도 간결하고 함축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이 과정은 니체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 말하자면 <차라투스트라>라는 책을 쓰기까지의 니체 사상의 변화의 모티브를 찾아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그 어떤 니체 전기보다 니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쓰는' 제2부는 모두 15개의 소주제로 나뉘어져 있다. '신은 죽었다', '노동이 아니라 전쟁을 권한다',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조심하라',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 '순수한 인식을 꿈꾸는 자는 음탕하다' 등등 언뜻 보아서는 '이게 뭔 소리야?'라는 의문이 저절로 나올 만한 주제들이다.
니체에 대한 그간의 이런저런 오해들은 사실 니체 자신이 아니라 니체의 사상을 제멋대로 해석한 사람들의 몫이겠지만 나치즘과의 연관성 문제는 오해 치고는 너무나 지독한 오해이다. 그토록 '자유정신'의 위대함을 노래하며 독일 제국주의의 문화를 비판했던 니체를 독일의 파시스트들이 자신들의 우상으로 숭배하는 아이러니...
앞에서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지은이가 니체와 구별되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는데, 2부의 본문들을 꼼꼼히 읽어나가면서 느낄 수도 있겠지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2부의 15개의소주제마다 붙은 도판들이다. 채플린 영화의 한 장면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홉스의 <리바이어든> 책표지를 인용하기도 하고 그림이나 포스터 등을 인용하면서 각 소주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암시하고 있는 것.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도판들과 그 주해가 주는 암시는 이제 지은이가 본격적으로 니체를 '해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실제로 이 책 2부의 마지막 '위버멘쉬'(기존에 '초인'이라는 말로 알려진)에 대한 장에서는 적극적으로 지은이의 해석이 시도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해석'한다는 것은 어떤 '판단'을 하는 것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지은이는 '아직도 자신에게는 니체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엔 분명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미 충분히 니체를 사랑한 지은이였기에 이러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그 사랑에 대한 결실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이것은 어쩌면 지은이가 자신을 걸려 넘어지게 한 니체를 딛고 일어설 준비를 마쳤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어찌 됐건 지은이가 애초에 가고자 하던 길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 길을 다시 가기 위해서라도 '니체로의 여정'은 동반자를 구하기 위한 잠깐의 '외도'라고 봐야 할 것 같기에 말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니체를 동반자로 받아들인 그 새로운 여행은, 그가 애초에 가고자 한 맑스로의 길이든지 전혀 다른 길이든지 간에 무엇인가 새로운 삶을 생성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지은이의 건투를 기원한다.
지은이는 <차라투스트라>를, 스스로 고통과 치유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니체를 창조해가는 니체의 정점에 있는 책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이 과정을 이 책의 제 1부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보통의 책에서라면 저자의 전기 부분에 해당하거나 특정한 저작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다소 독특하게 묘사되고 있다.
'생의 결핍 때문에 겪는 고통이 아니라 생의 과잉 때문에 겪는 고통'이라는 니체의 말로 압축되는 <차라투스트라>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니체의 그 어떤 전기보다도 간결하고 함축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이 과정은 니체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 말하자면 <차라투스트라>라는 책을 쓰기까지의 니체 사상의 변화의 모티브를 찾아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그 어떤 니체 전기보다 니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쓰는' 제2부는 모두 15개의 소주제로 나뉘어져 있다. '신은 죽었다', '노동이 아니라 전쟁을 권한다',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조심하라',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 '순수한 인식을 꿈꾸는 자는 음탕하다' 등등 언뜻 보아서는 '이게 뭔 소리야?'라는 의문이 저절로 나올 만한 주제들이다.
니체에 대한 그간의 이런저런 오해들은 사실 니체 자신이 아니라 니체의 사상을 제멋대로 해석한 사람들의 몫이겠지만 나치즘과의 연관성 문제는 오해 치고는 너무나 지독한 오해이다. 그토록 '자유정신'의 위대함을 노래하며 독일 제국주의의 문화를 비판했던 니체를 독일의 파시스트들이 자신들의 우상으로 숭배하는 아이러니...
앞에서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지은이가 니체와 구별되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는데, 2부의 본문들을 꼼꼼히 읽어나가면서 느낄 수도 있겠지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2부의 15개의소주제마다 붙은 도판들이다. 채플린 영화의 한 장면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홉스의 <리바이어든> 책표지를 인용하기도 하고 그림이나 포스터 등을 인용하면서 각 소주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암시하고 있는 것.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도판들과 그 주해가 주는 암시는 이제 지은이가 본격적으로 니체를 '해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실제로 이 책 2부의 마지막 '위버멘쉬'(기존에 '초인'이라는 말로 알려진)에 대한 장에서는 적극적으로 지은이의 해석이 시도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해석'한다는 것은 어떤 '판단'을 하는 것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지은이는 '아직도 자신에게는 니체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엔 분명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미 충분히 니체를 사랑한 지은이였기에 이러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그 사랑에 대한 결실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이것은 어쩌면 지은이가 자신을 걸려 넘어지게 한 니체를 딛고 일어설 준비를 마쳤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어찌 됐건 지은이가 애초에 가고자 하던 길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 길을 다시 가기 위해서라도 '니체로의 여정'은 동반자를 구하기 위한 잠깐의 '외도'라고 봐야 할 것 같기에 말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니체를 동반자로 받아들인 그 새로운 여행은, 그가 애초에 가고자 한 맑스로의 길이든지 전혀 다른 길이든지 간에 무엇인가 새로운 삶을 생성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지은이의 건투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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