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화파의 영수 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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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대적 배경
2. 최명길의 생애 및 업적
3. 주화론(主和論)
4. 읽기자료-최명길에 얽힌 설화
5. 후대의 평가
6. 참고문헌

본문내용

데타로 몰아낸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었다. 광해군은 후금(청나라)의 급성장에 따른 동북아 정세의 급변에 대비해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반정 세력은 이를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린 행위라고 비판한 것이다.
4년 뒤 후금 군사 3만명이 압록강을 넘어 침범했다. 정묘호란이다. 또 다른 쿠데타를 겁냈던 반정 세력은 국방력 강화에 소홀했다. 반정 세력은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을 내세워 집권했지만, 군사력 열세라는 현실 앞에서 후금을 형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후금은 1636년 4월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에 형제의 관계를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다. 조선은 이렇다할 방비책도 없이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했다. 여전히 대명의리론에 사로잡혀 있었다.이 해 12월 청군 12만명이 쳐들어 왔다.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강화도를 최후의 거점으로 잡고 싸워볼 계획이었지만 발빠른 청군이 길목을 차단하는 바람에 남한산성에 갇히고 말았다. 조정은 현실을 인정하자는 최명길 등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김상헌 등 척화파로 나뉘었다.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김상헌이 찢자 최명길은 이를 다시 기워 보냈다.
훗날 김상헌 등 척화파는 조선의 영웅이 되었다. 이들의 기개 덕분에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의 정신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이들의 주장대로 계속 전쟁을 했다면 한반도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까. 이런 점에서 현실주의자인 주화파 덕분에 조선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고, 척화파가 나중에 빛을 보게 된 것도 이들의 위기관리 능력 덕분이라는 분석도 있다. 주화파와 척화파 모두 방법이 달랐을 뿐 나라를 구하자는 데서 공통이었고, 결과적으로 상호보완을 하게 된 것이라는 평가다. 개인적인 생각을 보태면 ‘최명길은 바르고 옳았다. 하지만 조선후기 지배층의 테두리 안에서 김상헌에게 졌을 뿐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6. 참고문헌
『조선조 대외사상의 흐름』(유근호,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4년)
『우리 역사를 움직인 20인의 재상』(박윤규, 미래M&B, 1999년)
『동아세계대백과사전 26권』(편집부, 두산동아, 1992년)
『조선왕조에서 배우는 위기관리의 리더십』 (오인환, 열린책들, 2003년)
『역사비평 1998 봄 통권 42호』(편집부, 역사비평사, 1998년)
『대동기문(중)』(강효석 , 명문당, 2000년)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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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0.05.08
  • 저작시기2005.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08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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