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암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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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왕암에 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대왕암이란?

Ⅱ. 문무왕은 누구인가?

Ⅲ. 대왕암의 구조

Ⅳ. 대왕암에 얽힌 설화

Ⅴ. 대왕암을 통해 본 당시의 사상

Ⅵ. 대왕암에 관한 의문

<참고문헌>

본문내용

할을 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1) 호국 신앙 :한국 불교의 일관된 신앙으로, 숭신으로 호국한다는 사상.
불교를 굳게 믿음으로써 국가와 왕실의 번영을 생각하는 이른바 현세 불교적 신앙에서 나왔다. 불교와 왕권은 이 호국신앙과 굳게 결부되어 있었고, 그리하여 역대 제왕들은 더욱 불교를 숭상하고 장려해 왔다. 이와 같은 신앙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우리의 정신계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탑이 왕조의 무궁함을 바라는 호국 기원에서 세워졌고, 문무왕(文武王)이 당병의 내침을 물리치고 백제 ·고구려의 옛 땅을 통합한다는 사상에 입각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한 사실, 또한 전설에, 문무왕이 평소 지의법사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호국의 대룡이 되어 불법을 숭봉하고 우리나라를 수호하고 싶다”고 한 사실 등은 모두 이에서 연유한 사상이다.
2) 호국룡
용은 기린·봉황·거북과 더불어 사령(四靈)이라 불려온 상상적 동물이다. 용은 고대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 이른바 문명의 발상지 어디에서나 이미 오래 전부터 상상되어온 동물로서 신화나 전설의 중요한 제재로 등장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의 대상으로서도 큰 몫을 차지해왔다. 용은 어디까지나 상상적 동물이기 때문에 민족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나 기능이 조금씩 달리 파악되어 왔고, 따라서 그 조각이나 묘사의 표현 역시 차이를 보여 왔다. 한국 사람들이 생각해온 용은 대개 일찍이 중국인들이 상상하였던 용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문헌인 《광아》익조(翼條)에 용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놓았다. “용은 인충 중의 우두머리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즉 머리는 낙타와 비슷하고, 뿔은 사슴과, 눈은 토끼와, 귀는 소와, 목덜미는 뱀과, 배는 큰 조개와, 비늘은 잉어와, 발톱은 매와,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그 중에는 81개의 비늘이 있고, 그 소리는 구리로 만든 쟁반을 울리는 소리와 같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고, 턱 밑에는 명주(明珠)가 있고, 목 아래에는 거꾸로 박힌 비늘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박산(博山)이 있다.”이처럼 각 동물이 가지는 최고의 무기를 모두 갖춘 것으로 상상된 용은 그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한 것으로 믿어져왔으며, 특히 물과 깊은 관계를 지닌 수신으로 신앙되어왔다.
여러 동물의 특징적인 무기와 기능을 골고루 갖춘 것으로 믿어져온 용은 힘차게 날아오르는 웅장하고 씩씩한 기상과 희망의 상징으로 인식되었고 동시에 지상 최대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물로도 숭배되어왔다. 이러한 용은 비를 내리고 바다를 관장하는 수신으로서, 불교의 호교자로서, 그리고 왕권을 수호하는 호국룡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면서 가지가지 용신신앙을 발생시켰고, 많은 설화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어주었다. 민족이 융성하고 국운이 왕성할 때의 용은 보다 힘차고 용맹스러운 자태로 승천의 웅지를 떨치면서 민중 앞에 군림하였다. 그러기에 한민족이 상상해온 용의 승천은 곧 민족의 희망이요 약진으로 표상되고 있다.
Ⅵ. 대왕암에 관한 의문
1) 문무왕릉은 여기가 아니다
과거 흔적을 보면 감은사가 있는 곳에 나루터가 있다. 그것으로 비추어 볼 때 그 당시 바다는 감은사 앞 나루터가 있는 곳까지 물이 들어왔다는 것이 되고 수심은 지금보다 약 1.5m가량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으로부터 추정해 보면 지금도 물속에 잠겨있는 문무왕릉이 고대 지금보다 1.5m 가량 수심이 높았을 때는 과연 보이기나 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으며 설령 보였다 하더라도 기록에 있는 ‘동쪽에 있는 큰 바위’로 보였을까? 라고 하는 점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능이라 하면 왕이나 왕비가 죽은 후 그 유해를 모셔놓은 곳을 말하는데 실제 대왕암을 조사한 결과 유골이나 유해가 안치될만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한 부분에서 볼 때 이곳이 문무왕릉인가? 라는 물음에는 의문이 남는다.
< 현재의 감은사 앞 전경 > < 고대의 감은사 앞 전경 >
2) 문무왕은 왜구를 처단하기 위해서 동해바다에 묻혔다
설화를 보면 ‘문무왕이 평소부터 호국용이 되어서 왜적을 막고자 염원하여 마침내 동해안의 대왕암에 묻어줄 것을 유언하고 죽었다.’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당시 신라는 동아시아의 모든 세력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왜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신라의 적국이었던 당을 견제하고 유사시 후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왜와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문무왕이 왜를 의식해 동해바다에 묻힐 정도로 왜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설화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며 그에 대한 자세한 점은 위에서 관련설화 부분에서 언급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3) 문무왕은 화장을 했고, 대왕암은 문무왕의 산골처다
문무왕릉에 대한 실제 조사 후 대왕암이 문무왕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 아니라 문무왕 산골처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은 자신이 죽고 열흘 뒤에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리고 그 주장에 따르면 문무왕의 유해를 화장한 장소가 경주 낭산에 있는 능지탑이라고 말하고 있다. 옛 신라인들이 신성시 했던 경주 낭산에 일반인의 화장터 같은 것을 놓아둘 리 없으며, 그곳에 화장터가 있다는 사실은 국가적으로 봤을 때 중요한 인물의 화장터일 확률이 높으며 그 사람은 죽어서 화장을 하라고 유언을 남긴 문무왕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고문에 나온 장소에 대한 언급이 능지탑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또한 능지탑이 문무왕의 화장터이고 탑묘로 세워졌다면, 유언에서 호화로운 분묘는 부질없는 짓이니 검소한 장례를 하라고 말했던 문무왕의 유언을 거역한 것이 되므로 이 주장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언가 석연찮은 점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 용설화의 역사적 전개, 이동철, 민속원, 2005
최초 발굴 신라대왕암, KBS 역사스페셜, KBS, 2001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삼국유사 새로 읽기(1) -기이편-, 신종원, 일지사, 2004
네이버 블로그 http://blog.daum.net/jikyeong/10979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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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08
  • 저작시기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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