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서 론

본 론

Ⅰ.‘임나’의 정체

Ⅱ. 임나일본부설
- 개요
- 임나의 위치

Ⅲ.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는 이유

Ⅳ.
① 일본측의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자료
- 일본서기
- 송 서
- 칠 지 도
②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대표적인 학설들
- 출선기관설
- 기마 민족설
- 가야의 왜설
- 본국설
- 백제군 사령부설
- 외교 사절설

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

Ⅵ. 일본 역사교과서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라도 남아 있을 텐 데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으며 유물이나 유적 또한 전무하다든지, 당시 일본열도는 통일 제국이 형성되지 못한 분국 형태인데 바다 건너 식민지를 경영 할 수 있었겠으며 식민지 경영의 필요성에 대한 명백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든지,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당시 가야는 왜보다 약 반 세기 앞선 선진 문화 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왜의 가야 지배가 가능했겠는지등의 의문이 있기에 임나일 본부의 허구성은 명백해진다. 그리고 오히려 북한 김석형씨 같은 경우는 삼국 이 전의 삼한부터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 인들이 정치, 군사적 거점을 구축하고, 이 전 거주지인 백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마한 등의 이름을 붙이고 본국과 긴밀
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4세기 이후 일본에서 통일 기운이 형성되는 속에서 일본 내에 있는 가야의 분국인 임나에 설치한 것이 임나일본부라 하면서
송서 관직명의 문제점을 규명하고 있다. 7국 4읍의 위치도 일본에서 찾으면서 이 에 따라 칠지도도 백제왕이 일본 내의 분국왕에게 하사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거꾸 로 한반도인의 일본 진출을 증명하는 것으로 임나일본부를 해석하기도 한다.
Ⅵ. 일본 역사교과서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인 대화정권(야마다 정권)이 4세기후반(서기 368년)에 한반 도에 진출해서 6세기중엽(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킨 서기 562년)까지 약 200년 동안 가야, 백제, 신라를 지배하고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두어 직접 가야를 통치했다 ’
이는 백제가 우세한 경제, 문화, 군사력을 가지고 구주지방에 진출하고 대가야와 금관가야가 일본에 진출하여 나라를 세우고 사회를 발전시켰다는 한국측의 사서와 는 그 내용이 상반되는 것이다.
2002년부터 사용된다는 일본의 중학교용 역사교과서가 한중 양국의 커다란 반발 을 가지고 왔던 것은 기억할 것이다.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가 전체 적으로 근현대사의 가해 기술을 축소하고 '침략'을 '진출'로 바꾸는등 일본의 역 사인식이 1982년 당시로 되돌아간 듯하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보다 더욱 비난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우익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편찬한 후 소샤 교과서가 한중 양국의 불합격 요구에도 불구하고 검정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다. 문제의 교과서는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 주장을 희석하고 거의 언급하지 않았 던 가해사실을 추가하는 등 137곳을 고쳤지만 우려대로 편찬자의 의도를 어떤 형 태로든 남겼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 역사왜곡의 예 - 고대사 부분에 남은 '미마나 일본부설'
'야마토 조정은 4세기 후반 바다를 건너 조선에 출병, 반도 남부의 미마나라는 곳 에 세력권을 차지했고 후대의 일본 역사서는 그 거점을 미마나일본부로 불렀다'는 기술은 검정 결과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미마나라는 곳에 거점을 둔 것으로 여겨진다'로 축소 수정됐다. 그래도 비슷한 내용을 담은 다른 7종의 교과서가 '미 마나' 라는 표현을 피한 것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어떻게든 임나일본부설을 환기하 기 위한 기술이다. '미마나'는 임나(任那)의 일본식 음독으로 '니혼쇼키'의 '미마나' 와 같은 표기로 여겨지고 있다. 현대 일본어의 음독인 '닌나', 또는 읍락국의 수장 을 뜻했던 우리말의 '니나마'가 음운 변화를 거친 결과로 여겨지고 있다. 임나라는 지명은 삼국사기나 광개토왕비를 비롯한 한중 양국의 문헌과 금석문에도 언급돼 있다.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김해의 금관가야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크게 보아 가야의 별칭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여기에 '일 본부'가 붙어 임나일본부가 되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부'는 중국 한나라때 장
군들이 천자로부터 위임받은 군사행정권의 행사를 위해 설치한 군사통치기구에서 시작됐다. 일본 보수학계는 니혼쇼키의 임나일본부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여 가야 에 일본의 군사통치기구가 실재했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주장은 오랫동안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됐으며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니혼쇼키의 관련기술이 한정된 6세기 당시에는 아직 '일본'이라는 국호가 쓰이지 않았다는 등의 수많은 모순은 일본내에서도 일 찌감치 지적돼왔다. 그러니 남북한 학계의 반발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니혼쇼키 관련 기사의 주어를 일본 대신 백제로 읽어 임나일본부를 백제가 가야에 설치한 군사기구로 보려는 시도는 물론 임나를 쓰시마나 규슈에 비정하려는 노력까지 전 개됐다.
. 결 론
1949년 스에마쓰(말송보화)에 의하여 완전히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그 뒤의 많은 연구자들에 의하여 비판되고 수정되어, 이제는 학설로서의 생명을 거의 잃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로 본격화된 임나 관계의 연구들은 서로 근접된 인식들 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6세기 전반으로 한정하여 취급한다든 가,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지배가 아닌 외교의 측면에서 이해한다든가, 임나문제에 대하여 백제의 역할을 중시한다든가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6세기 이전의 가야사 및 일본 고대사 자체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진한 탓으로 인하여 그들사이 의 대외 관계사로써의 성격을 지니는 더 이상의 규명이 어려운 단계에 와있다. 그 러므로 일본 서기에 나타나는 6세기 중엽 당시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해서는 가
야사 및 일본 고대사의 철저한 연구 이후에 재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일 본 역사 교과서에는 임나일본부설이 당당한 정사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 하면서 국내 학계의 분발을 바랄 뿐이다.
. 참고 서적
- 한국의 역사와 문화(김방저)
- 고대조일관계사-대화정권과 임나-(조선사연구회 편역, 김석형저)
- 한국고대국발달사(김철준저)
-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김태식저)
- 시민을 위한 가야사 (집문당, 1996)
- 역사비평의 "광개토왕릉과 임나일본부설" (김태식저)
- 인터넷 이용 : http://www.kbs.co.kr/history/vod.shtml
- 인터넷 이용 : http://bluecabin.com.ne.kr/investigation/imnailbonbu.htm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10.05.11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0988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