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민족 사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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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교회의 민족 사회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기독교의 민족 사회운동
1. 교회와 충군애국의 민족정신
1.1. 충군애국의 교회
1.2. 우리 겨레 평등사상
1.3. 교회와 태극기
1.4. 자유민권
2. 반일(反日)의 민족, 인권운동
2.1. 반일 민족운동
기독교인들의 반일
기독인들의 반일저항
2.2. 우동선(禹東鮮)과 서상륜(徐相崙)의 갈등관계
3. 항일 사회정의운동
3.1. 일제의 경제침략에 대한 저항
3.2.토지 수탈에 대한 반일저항과 사회정의
일제 민간차원 토지 수탈
일제 군부(軍部)의 토지수탈
3.3. 합병직전의 일제 경제 침략에 대한 교회의 저항
서북지방과 기독교
교회의 저항

본문내용

사실이다. 쉬어러는 분명히 네비우스방법이 서북 교회를 성장시킨 원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시인하였다. 따라서 서북교회이 기적적인 발전은 네비우스 방법의 적용, 그리고 그럴만한 지역적 배경, 이 양자가 피차 교섭한 결과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해답일 것이다. 이와같은 결과로 1897년경에 이미 자립, 자급, 자주의 교회로 부상할 수 있었다. 민경배, 한국교회의 사회사(1885-1945), op. cit., pp. 175-182.
교회의 저항
웰즈(J. H. Wells)가 예연하였던 바와 같이 일제 경제침략에 대한 체계적인 전개는 서북의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1907년 평양의 협동회 사장 안태국(安泰國)이 지방세목 조사라는 명목으로 일경에게 구인된 일이 있었다. 그는 잘 알려진 기독교인 이였고, 얼마 후 ‘105인 사건’ 때에는 반증 제출로 일제의 날조를 만천하에 폭로하는 예언자적 인물이었다.
그의 구속에 분노한 평양의 상인들이 안창호(1878-1938)의 지도로 공동회를 조직 8일간의 철시(撤市)를 강행하였고, 노동자 300명은 일본인 상점을 공격하기도 했다. 당신 평양의 여러 민회(民會)는 곧 자강회나 청년회 특히 상업중의소(商業衆議所)는 기독교인들과 ‘서로 결탁해서’안창호의 기독교정신에 호응하고 있었다.
이토에 의해 평양을 정찰한 우치다의 글에 의하면, 어음 폐지, 수형의 사용강제와 매 수형마다 첨부해야 하는 3전의 세금, 가혹한 지방세의 신설, 이런 것들이 ‘시민 반수 이상이 서교도(西敎徒)인’ 평양에서 배일 감정을 자극한 원인이었다는 분성이 나아고 있다.
1910년 1월에 평안남도 순천에서는 합병반대운동이 터져 나왔다. 이 사건은 돌발적인 사건으로 순천 시민 3천여 명이 세무서와 군청 그리고 일본인 상점들을 습격해서 파괴 방화까지 한 극렬한 시위였다. 근대 상술을 익힌 간악한 일제 상인들의 침투, 시장세와 같은 증세에 쌓은 분노의 폭발이었다. 1909년 4월 지방비법에 의해 설립된 세금으로 매상액에 1/100을 세금으로 내야하는데 영세 농민의 달걀 하나에도 그렇게 과세하는 제도였다. 일제는 개항 이래 1909년까지 2만 7천의 일본상인을 이주 시켜, 넉넉한 자본으로 한국 상인들을 위축 시켜 오고 있었다.
평안도의 일제 경찰부장은 이 사건에 교인들이 ‘더욱 배일을 고취하였기 때문에 이들 무리가 자연 결집해서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서 마침내 폭동을 감행하는 데까지 이르게 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항거는 대구에서도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나타났다. 김광제와 서상돈이 천3백만 원이 넘는 국채를 상환을 목적으로 단연 구국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한국의 2천만 동포가 담패를 끊고 한 사람이 한 달 담배값 20전을 내서 3개월만 모으면 그 국채를 갚을 수 있다는 일대 구국 운동이었다. 소작직에는 윤응열 윤치호의 부친, 전직 병무사. 1895년 춘생문 사건때 언더우드와 협력.
이었고 총무는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이 맡고 있었다.
김광재 [金光哉, 1901~1950]
독립 운동가. 경상북도 영덕 출생. 안동의 협동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청하시장(淸河市場)에서 독립운동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였다. 1925년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생활을 하다가 1950년 죽장(竹長)국교 교장으로 재직 중 병으로 사망하였다
서상돈 [徐相敦, 1850.11.10~1913.6.30]
조선 고종 때의 민족운동가이다.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대구의 광문사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일제는 교회를 신경쓰기 시작하였다. 하여 그들의 피안의 인식을 구하는 신앙과 그 구원의 설교를 하는 선교사들이나 정교분리의 원칙에 철져한 교회인들과 함께, 조선 교인의 입신 동기가 꼭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가 영향을 미칠 데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돈을 움켜쥐고 있겠다는 이들의 억센 힘을 풀고, 선량하고 순수한 시민으로 계도하는 일’이란 주장이 [The Seoul Press]에 1908년 8월 9일자에 실렸다. 교회는 역사 참여에 대한 반론은 대개 이런 유형을 따르고 있다. 민경배, 한국교회의 사회사(1885-1945), op. cit., pp. 182-185.
167, 164, 162, 168, 169, 173,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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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3
  • 저작시기2009.9
  • 파일형식한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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