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수련생의 정서에 관한 조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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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연구방법

Ⅲ. 연구결과

Ⅳ. 논 의

Ⅴ. 결 론

참고문헌

<보충자료>

본문내용

피땀를 흘리며 태권도를 전하였을 것을 생각을 하니 가슴속 저 밑에서 솟아 나오는 형용할 수 없는 용기와 투지 생겼다.
“ 그래! 이건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한 몸 으스러지더라도 종주국의 태권도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몸으로서 보여 주자. ”하고 생각하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를 여럿 배출할 만큼 기본기나 기술적으로 가르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지난 32년 동안 태권도 수련을 통하여 깨달은 바름(正)과 어울림(和)을 통한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것이였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였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음으로 해서 나의 뜻이 제대로 전달 되어 지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 였다.
이러한 것 외에 나는 시차라는 적과도 싸워야 했으며 심지어는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닭, 한 밤에 스쳐가는 소나기와 바람소리와도 싸워야 했으며 음식문화의 차이로 인한 배고픔과도 싸워야 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가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몸이 말을 안들어 힘이 드는 가운데 삼일째 되는날 아침의 일이였다.
수련을 하러 오는 60대의 여성이 “Grandmaster Park! Aloha! ”하는 인사에 귀를 의심했는데 이어 들어오는 수련생들의 이어지는 “Grandmaster Park! Good morning?”하는 인사에 나약했던 나의 의지를 탓하고 후회하며 반성했다.
Grandmaster!!
그랜드마스터!! 이것은 그들이 존경심을 나타낼 때 하는 최고의 찬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로서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다시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리고 그들과 호흡을 같이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흘의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 세미나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
많은 태권도의 수련생들이 언제 다시 오느냐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가운데
하와이에 주재하는 한국일보 기자에게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 태권도의 전망을 질문 받고 답하다 앞으로 외국에서의 태권도사범은 한국인보다 외국 현지에서 외국인사범들이 주도하는 시대가 올 것 같다고 말한 뒤 국내 태권도의 현실을 이야기하다 기어이 나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모두들 잘해야 하는데... 잘해야 하는데....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나를 보고 누님같은 기자의 눈도 어느새 붉어 지고 있는데 스미스사범이 의아해 하며 묻는다. 왜 우느냐고....그래서 나는 한국일보 기자에게 “ 스미스사범님의 태권도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 감동 받아 그렇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진주만의 푸른 바다 앞에서 나는 갈등했다.
1955년 최홍희씨에 의해 創案(창안)되어 탄생 된 오늘날의 태권도가 있기까지 살펴보면
(1) 1944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도장을 설립된 청도관의 이원국씨( 쇼토칸 카라테(松道館 空手道) 수련)
(2) 송무관의 노병직( 일본대학교 카라테부에서 쇼토칸 카라테를 배움. 후나고시기찐에게 배웠으며 송도관에서 '송'을 따서 '송'무관이라고 관명을 정함)
(3) 연무관의 전상섭( 청소년 시절에 유도를 배우고 동양척식대학교(일본) 카라테부에서 카라테를 배움. 한국전쟁 때 지도관으로 개칭함)
(4) 창무관의 윤병인( 만주에서 중국무술을 배우고 일본대학교 카라테부에서 슈토칸 카라테(手道館 空手道)를 배움. 슈토칸 카라테의 창시자 '도야마 간켄'과 무술 교류하며 카라테 5단이 되었고 카라테부 주장 역임)
(5) 무덕관의 황기( 만주에서 담퇴12로, 태극권을 배우고 46년 철도국 도장시절 카라테를 서적으로 연구 후에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여 수박도로 개칭)
(6) 오도관의 최홍희( 중앙대학교(일본) 카라테부에서 카라테를 배움)에 의해 시작된
태권도라는 명칭이전의 초기에는 공수 또는 당수로 불리며 중국무술과 일본 가라테를 수련한 분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당시로 기술체계가 잡혀있는 가라테의 기술체계를 도입하여 수련하였다.
이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후 우리는 최홍희씨에 의해 태권도라는 공식명칭을 확정하고 정치적인 문제로 캐나다로 망명한 최홍희씨에 의해 ITF태권도는 무술적 가치를 지닌 사인웨이브를 발견하고 틀에 접목시켜 독특한 태권도를 완성시켜 왔으며, WTF태권도인 우리나라는 우리의 몸짓과 발질이 가미되고, 창의적인 격투기술을 발전시킨 후, 태권도 경기화를 통하여 독특하고 실전적인 기술체계를 완성시켜왔다.
이러한 사실적 역사를 인터뷰에서 나는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나를 혼란에 빠트린 것은 자청해서 통역을 맡아준 찰리 모친의 질문 이였다.
찰리는 미국 본토에서 ITF태권도를 4년간 수련하였다.
그리고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와서 WTF태권도장에 입관하니 이전에 배운 ITF태권도를 인정하지 않는데 도대체 뭐가 다르기에 같은 한국에서 보급된 태권도를 수련하는데 인정
하지 않는 것이냐는 것이였다.
나는 대답 대신 지금 내가 여기(하와이)에 와서 말하고 싶은 것은 태권도를 통한 깨달음과 그것을 통한 실천으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가치 있는 것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태평양의 검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조국의 상황과 태권도의 현실을 직시하니 연어의 신비처럼 태권도는 나에게 형용할 수 없는 서글픔과 희망이 교차되어 밀려 오고 있었다.
연어는 신비를 지닌 생명체다
연어가 그 먼 베링해에서 어떠한 추적 장치로
모천인 남대천으로 오는지,
남대천이 모천인지 무엇으로 기억하는 지,
왜 모천에서 산란해야 하는지,
산란 후 왜 그토록 빨리 죽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연어가 떠나는 봄, 연어가 돌아오는 가을,
남대천은 연어에게 묻지 않는다.
왜 그 먼길을 찾아 내게 오는 지를.
단 그 생명의 안스러움을 가슴에 묻어둔 채 생명수로 흐르고 있다.
-연어의 신비중에서 -
그렇다.
태권도는 묻지 않는다.
영원히 내게 묻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를 지켜보며 수련을 멈추지 않는 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내게 스미스 사범은 말했다.
내가 가는 길을 그도 가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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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3
  • 저작시기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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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1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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