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르네상스의 도래
2. 르네상스 역사서술의 시작
(1)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의 형성
(2) 페트라르카의 역사서술
3.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의 특징 -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 年譜的 서술
(2) 傳記的 서술
(3) 博學的 서술
(4) 言語學的, 批判的 서술
(5) 현실적, 정치적 서술
-마키아벨리
-귀치아르디니
4. 이탈리아 이외 지역의 역사서술
(1) 이탈리아 이외 지역의 인문주의 역사서술의 특징
(2) 프랑스의 回想錄的 민족사적 서술
(3) 영국의 민족사적 서술
(4) 독일의 민족사적 서술
5. 마치며-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의 한계와 의의
2. 르네상스 역사서술의 시작
(1)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의 형성
(2) 페트라르카의 역사서술
3.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의 특징 -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 年譜的 서술
(2) 傳記的 서술
(3) 博學的 서술
(4) 言語學的, 批判的 서술
(5) 현실적, 정치적 서술
-마키아벨리
-귀치아르디니
4. 이탈리아 이외 지역의 역사서술
(1) 이탈리아 이외 지역의 인문주의 역사서술의 특징
(2) 프랑스의 回想錄的 민족사적 서술
(3) 영국의 민족사적 서술
(4) 독일의 민족사적 서술
5. 마치며-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의 한계와 의의
본문내용
내용이 취급되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 역시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나 비판적인 태도보다는 문학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후에 영국 역사서술의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유럽의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의 경향성을 영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반영시켰던 역사가로서 영어를 사용하면서 고전적 전기형식으로 『리차드 3세의 역사』를 저술했다. 또 한명의 역사가인 버질(Polydor Vergil, 1470~1555)은 이탈리아인으로서 『영국사』를 저술했다. 이 작품은 자료비판에서 충분치 못하였고 역사적 관점도 결여되어 있었으며 교회전설도 수록했지만 역사서술에 있어서 여러 다양한 문서들과 사료들을 이용함으로써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사회적, 경제적 상태는 물론 민속에 관한 풍부한 내용까지 담아냈다.
(4) 독일의 민족사적 서술
독일의 경우 유럽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적 역사서술로부터 가장 영향을 적게 받았던 곳이다. 독일은 정치적으로 수십 개의 영주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고 독일의 교양계층은 종교개혁 때문에 신학자들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으므로 독자적인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을 시도하기 어려웠다. 또한 중세의 제국사상이 역사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일반적으로 중세의 형이상학적, 신학적사고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때문에 지적발전 속에서도 독일의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은 미약했고 부족사와 지방사 그리고 중세적인 세계연대기들이 작성되었다. 빔펠링(Jacob Wimpfeling, 1450~1528)은 독일의 인문주의자로서 『獨逸史適要』를 저술했다. 빔펠링은 인문주의 정신에 능통한 것은 아니었고 고대문헌을 비판할 줄 몰랐고 신의 섭리를 믿었다. 하지만 독일사를 처음으로 근본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서술했다는 점과 독일민족사 서술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5. 마치며 -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의 한계와 의의
르네상스시기에 인문주의적 정신태도는 새로운 역사서술을 탄생시키면서 근세 서양에서 유형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시기에는 역사서술에 대한 전반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인문주의적 정신태도는 중세의 신학적 사고체계인 기독교적 역사관을 탈피했고 고전고대의 세속문화와 인간적인 관심들을 새로이 발견했다. 이로써 기존의 신학적 역사관과 유기체적 역사관을 벗어나 역사의 중심에 인간을 설정했고 고대의 순환론적 역사관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역사의 세속화’를 전개해 나갔고 역사서술의 취급주제, 연구방법, 서술형식에서도 변화를 맞이했다. 또한 역사서술이 속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역사를 인간활동의 결과로서 취급하고 교황의 행적까지 정치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역사가들을 모방하는데 의의를 두었기에 한계를 드러냈다. 인문주의자에게는 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역사란 진보가 아닌 순환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또한 역사 자체의 법칙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라 지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때문에 역사철학은 거의 발달하지 못했으며 인식이론의 발달도 없었다. 게다가 역사의 전개를 단절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바로 선행했던 기독교시대의 후손임을 생각하지 못했고 중세의 한계성을 단계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태도조차 결여되어 단지 암흑시대로 치부해버렸다. 바자리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황제까지 계속되었던 시대가 고대(Antik)이고 그 다음 교황 실베스터(999~1033)에서 자기 당대까지의 시대가 오랜(Alt)시대, 즉 신고대이며, 그 사이에 거추장스럽게 끼어 있는 시대가 중세로서 그것은 암흑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뿐만 아니라 각 시대를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사고할 줄 모르는 비역사적인 사고를 보였다. 또한 인문주의역사가들은 고대를 모방하는 것에 큰 중점을 두었는데 고대의 사고뿐 아니라 역사서의 형태와 문체까지 모두 모방에만 그쳤다. 특히 다음과 같은 특징은 어느 인문주의 역사서술에서나 보이는 것으로 첫 번째는 하나의 역사서를 여러개의 권으로 나누고 각권을 일반적인 성찰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연대기적 서술을 하였으며 주제 또한 모방했는데 주로 전쟁이나 도시국가, 정치에 국한되어 있었다. 또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힘에 있어서 행위자의 동기에서 주로 찾아냈고 마지막으로 수사학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역사가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역사에 유용성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교훈을 주기위해 수사학적인 요소는 필수라 여겨졌다. 이런 점으로 살펴볼 때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은 분석이거나 종합적인 측면이 미약했다. 김응종, 「역사사상가, 마키아벨리」, 역사학보 176권, 2002년
그렇지만 인문주의자들의 역사서술의 중요한 의미는 인간의 역사를 다시 소생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고대와 르네상스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 중간에는 분명 중세가 있었고 중세와 기독교적인 가치가 마련해준 휴머니즘에서 출발하였고 자신들의 내면에 기독교의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재생’이란 개념만 해도 기독교의 종교적 개념이며, 인문주의란 하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이라 볼 때 처음부터 중세적 세계관을 거부하면서 의식적인 혁명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화기의 사상적 성격을 가지고 역사를 인간 활동의 결과로 이해하도록 만들고 역사의 현실적 의미를 강조시킨 것이 르네상스시기의 역사서술이 갖는 의미이자 근대의 역사서술에 기여한 점이 아닐까싶다.
*참고문헌
봉천서양사연구실, 『서양의 역사학 Ⅰ』, 청년사, 1997.
이상신, 『(改訂)西洋史學史』, 신서원, 1994.
車河淳, 『西洋史總論』, 探求堂, 1979.
P.O. Kristeller / 진원숙 역, 『르네상스의 사상과 그 원천』, 계명대학교 출판부, 1995.
H. E. 반스, / 안희돈, 허승일 역 『서양사학사』, 한울, 1994
진선영, 「귀치아르디니의 역사관: 『이탈리아사』를 중심으로」, 서강대 대학원 초록논문, 2002
김응종, 「역사사상가, 마키아벨리」, 역사학보 176권, 2002년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유럽의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의 경향성을 영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반영시켰던 역사가로서 영어를 사용하면서 고전적 전기형식으로 『리차드 3세의 역사』를 저술했다. 또 한명의 역사가인 버질(Polydor Vergil, 1470~1555)은 이탈리아인으로서 『영국사』를 저술했다. 이 작품은 자료비판에서 충분치 못하였고 역사적 관점도 결여되어 있었으며 교회전설도 수록했지만 역사서술에 있어서 여러 다양한 문서들과 사료들을 이용함으로써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사회적, 경제적 상태는 물론 민속에 관한 풍부한 내용까지 담아냈다.
(4) 독일의 민족사적 서술
독일의 경우 유럽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적 역사서술로부터 가장 영향을 적게 받았던 곳이다. 독일은 정치적으로 수십 개의 영주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고 독일의 교양계층은 종교개혁 때문에 신학자들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으므로 독자적인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을 시도하기 어려웠다. 또한 중세의 제국사상이 역사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일반적으로 중세의 형이상학적, 신학적사고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때문에 지적발전 속에서도 독일의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은 미약했고 부족사와 지방사 그리고 중세적인 세계연대기들이 작성되었다. 빔펠링(Jacob Wimpfeling, 1450~1528)은 독일의 인문주의자로서 『獨逸史適要』를 저술했다. 빔펠링은 인문주의 정신에 능통한 것은 아니었고 고대문헌을 비판할 줄 몰랐고 신의 섭리를 믿었다. 하지만 독일사를 처음으로 근본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서술했다는 점과 독일민족사 서술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5. 마치며 -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의 한계와 의의
르네상스시기에 인문주의적 정신태도는 새로운 역사서술을 탄생시키면서 근세 서양에서 유형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시기에는 역사서술에 대한 전반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인문주의적 정신태도는 중세의 신학적 사고체계인 기독교적 역사관을 탈피했고 고전고대의 세속문화와 인간적인 관심들을 새로이 발견했다. 이로써 기존의 신학적 역사관과 유기체적 역사관을 벗어나 역사의 중심에 인간을 설정했고 고대의 순환론적 역사관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역사의 세속화’를 전개해 나갔고 역사서술의 취급주제, 연구방법, 서술형식에서도 변화를 맞이했다. 또한 역사서술이 속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역사를 인간활동의 결과로서 취급하고 교황의 행적까지 정치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역사가들을 모방하는데 의의를 두었기에 한계를 드러냈다. 인문주의자에게는 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역사란 진보가 아닌 순환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또한 역사 자체의 법칙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라 지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때문에 역사철학은 거의 발달하지 못했으며 인식이론의 발달도 없었다. 게다가 역사의 전개를 단절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바로 선행했던 기독교시대의 후손임을 생각하지 못했고 중세의 한계성을 단계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태도조차 결여되어 단지 암흑시대로 치부해버렸다. 바자리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황제까지 계속되었던 시대가 고대(Antik)이고 그 다음 교황 실베스터(999~1033)에서 자기 당대까지의 시대가 오랜(Alt)시대, 즉 신고대이며, 그 사이에 거추장스럽게 끼어 있는 시대가 중세로서 그것은 암흑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뿐만 아니라 각 시대를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사고할 줄 모르는 비역사적인 사고를 보였다. 또한 인문주의역사가들은 고대를 모방하는 것에 큰 중점을 두었는데 고대의 사고뿐 아니라 역사서의 형태와 문체까지 모두 모방에만 그쳤다. 특히 다음과 같은 특징은 어느 인문주의 역사서술에서나 보이는 것으로 첫 번째는 하나의 역사서를 여러개의 권으로 나누고 각권을 일반적인 성찰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연대기적 서술을 하였으며 주제 또한 모방했는데 주로 전쟁이나 도시국가, 정치에 국한되어 있었다. 또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힘에 있어서 행위자의 동기에서 주로 찾아냈고 마지막으로 수사학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역사가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역사에 유용성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교훈을 주기위해 수사학적인 요소는 필수라 여겨졌다. 이런 점으로 살펴볼 때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은 분석이거나 종합적인 측면이 미약했다. 김응종, 「역사사상가, 마키아벨리」, 역사학보 176권, 2002년
그렇지만 인문주의자들의 역사서술의 중요한 의미는 인간의 역사를 다시 소생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고대와 르네상스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 중간에는 분명 중세가 있었고 중세와 기독교적인 가치가 마련해준 휴머니즘에서 출발하였고 자신들의 내면에 기독교의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재생’이란 개념만 해도 기독교의 종교적 개념이며, 인문주의란 하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이라 볼 때 처음부터 중세적 세계관을 거부하면서 의식적인 혁명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화기의 사상적 성격을 가지고 역사를 인간 활동의 결과로 이해하도록 만들고 역사의 현실적 의미를 강조시킨 것이 르네상스시기의 역사서술이 갖는 의미이자 근대의 역사서술에 기여한 점이 아닐까싶다.
*참고문헌
봉천서양사연구실, 『서양의 역사학 Ⅰ』, 청년사, 1997.
이상신, 『(改訂)西洋史學史』, 신서원, 1994.
車河淳, 『西洋史總論』, 探求堂, 1979.
P.O. Kristeller / 진원숙 역, 『르네상스의 사상과 그 원천』, 계명대학교 출판부, 1995.
H. E. 반스, / 안희돈, 허승일 역 『서양사학사』, 한울, 1994
진선영, 「귀치아르디니의 역사관: 『이탈리아사』를 중심으로」, 서강대 대학원 초록논문, 2002
김응종, 「역사사상가, 마키아벨리」, 역사학보 176권,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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