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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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덕수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수선전도
경운궁
대한문
중화문과 중화전
석어당
함녕전
정관헌
즉조당
석조전
경운궁 주변답사
중명전
구 러시아공사관

본문내용

등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1933년 내부를 개조해 일본 근대미술가들의 작품을 진열하다가, 1937년 11월 준공된 석조전 서측 별관과 더불어 이왕가(李王家)미술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석조전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1946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하기 위해 이곳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일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 등을 논의하기하기 위해 설립되었는데, 1946년 1월 16일 이곳 석조전에서 첫 예비회담이 열렸던 것이다.
그 뒤 석조전은 국제연합(U.N) 한국위원회에서 사용하다가, 1953년 이후 국립박물관, 현대미술관 등의 용도를 거쳐 현재는 문화재청 궁중유물전시관(宮中遺物展示館)으로 사용하고 있다.
석조전(石造殿)은 ‘돌로 지었다’는 뜻이다. 건물길이 54.2m, 폭 31m, 높이 17.5m이며 연건평 1,226평의 규모이다.
오얏꽃(李花) 무늬 (자두꽃)
다산과 번영의 상징으로 꼽혀온 오얏꽃은 다섯개의 꽃잎을 가지고 있다. 봄과 함께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듯 청초한 꽃잎을 피우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꽃무늬이다. 이화(李花)의「李」자가 조선왕조와 같아 양반들이 즐겨 써 왔지만 서민들에게도 널리 쓰여 떡살무늬로도 나타난다.
1937년 석조전 앞에 조성한 영국식 정원이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던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과는 달리 인공적이고 기하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석조전 앞에 있는 분수대는 원과 사각형을 조합하여 만들었으며, 중심을 지나는 동서남북 축을 기준으로 각각 좌우 대칭이다.
분수대에는 5개의 청동제 분수가 설치되어 있는데 가운데 원형 분수는 하늘을 향해 물을 뿜는 방사형(放射形)이고, 동서남북으로 배치된 4개의 물개조각은 각각 대칭축 방향으로 물을 뿜어내고 있다. 또한 분수대와 그 주변은 다른 지면(地面)보다 한 단을 낮춤으로서 석조전을 상대적으로 더 높게 보이도록 하고 있다.
한편 일제말기 일제는 포탄제조용으로 쓰기 위해 이 청동분수대를 뜯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의 분수대는 1984년 광복 39돌을 앞두고 문화재연구소의 주도하에 복원된 것이다.
솥 모양을 닮은 해시계라 하여 '앙부일구'라고 했다. 앙부일구는 1437년 세종 때 장영실이 처음 만들었으며, 시간뿐 아니라 절기(節氣)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13개의 위선(緯線:씨줄)은 24절기를 나타낸다. 맨 위는 동지(冬至), 맨 아래는 하지(夏至), 가운데는 춘분 또는 추분을 가리킨다.
경선(經線:날줄)은 시간을 나타내며 그 선 밑에는 시간을 말하는 12지상(支象)의 그림이나 글씨가 있다. 가운데 선은 12시 정오(正午)를 나타내는 자오선이다.
영침(影針 : 그림자로 시간과 절기를 나타내는 바늘)은 북극을 가리키며, 길이는 앙부일구의 반지름과 같다.
정확한 시간과 절기를 가리키기 위해서는 12시를 나타내는 자오선은 나침반의 남북방향과 일치하여야 하며 해시계의 받침대는 항상 수평을 유지하여야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7세기 후반에 만든 것이며 직경 35.2cm 높이 14cm이다. 덕수궁 앙부일구는 현재 보물 8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제] 장영실의 발명품입니다. 바르게 연결하세요!
자격루


태양의 고도와 출몰 측정
간의


물시계
앙부일구


휴대용 해시계
규표


천문과 기상 관측
현주일귀


해시계
경운궁 주변답사
돌담길을 걸으며...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칭하고 대한문에서 일직선상에 원구단을 만들었다. 황제 즉위식을 가지며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1899년 원구의 북쪽에 황궁우를 건립하고 신위판을 봉안하면서 태조를 추존하여 태조 고황제로 삼고 원구 황지기 위의 동남에 배천하였다. (사진 : 황궁우)
그 황궁우 앞에 1902년에는 고종 즉위 40년이자 연세가 51세가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3개의 석고를 세웠는데 이는 제천을 위한 악기를 나타낸 듯하다.
1903년 일제는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짓는다. 자신들이 조선의 것보다 선진적인 것을 보이고, 비교하기 위해 그 옆에 황궁우는 그대로 남겨 둔 것이다. 철도호텔은 뒤에 조선호텔이 되었고, 황궁우는 호텔에 딸린 정원처럼 되어 오늘날까지 대한제국, 즉 망국의 한을 간직하고 있다.
1900년 당시 경운궁이 부속 건물로서 접견장이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궁궐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단순한 2층 벽돌집이나 1층의 아치형 창과 2층 서쪽에 베란다가 꾸며져 있는 것이 특이하며, 이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이 자리는 경운궁 안 평성문 밖인데 1906년 황태자(순종)와 윤비의 가례가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을사조약이 조인된 우리 민족의 치욕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경운궁을 축소시키면서 1915년에 이 건물은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경성 구락부가 되어 1960년대까지 외국사람들의 사교장으로 쓰여왔다. 그러는 동안 1925년 화재로 모두 타고 벽면만 남았던 것을 다시 복구하였으므로 애초의 원형과는 달라져 있다. 최근까지 영친왕의 비인 이방자의 명의로 되어 있었으나 그 뒤 팔려 지금은 민간 회사의 소유가 되어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고종27년 (1890)에 건축된 르네상스풍의 건물로서 설계는 러시아인 사바틴이 했다. 625전쟁때 파괴되어 탑과 지하2층만이 남아 있었으나, 1973년에 현재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구조는 벽돌조 2층건물로서 한쪽에는 탑을 세웠다. 탑의 반원아치형 창위에 「페디먼트」 (창틀위의 박공모양 장식)로 꾸몄으며, 공사관 건물 벽체에는 원아치의 창을 냈고, 날개부 돌출부분에도 「페디먼트」창을 내었다. 특히 이곳은 고종 건양원년 (1896) 고종황제가 세자(순종)와 함께 덕수궁에서 옮겨 나와 다음해까지 기거했던 곳으로, 사진자료에 의하면 고종이 거처했던 방의 내부도 르네상스풍의 실내장식을 했었다. 현재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 일부가 발굴되었는데, 이것이 경운궁까지 연결되었다고도 한다.
(사진 :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서 일본군의 알현을 받는 고종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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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09
  • 저작시기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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