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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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를 내리게 된 중국 지도부는 중국 경제의 현대화를 가속화하려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중국 지도부내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와 그 운동을 지지하는 과격파와 반대하는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결국 소련모델을 폐기하고 새로운 자력갱생의 발전정책을 채택하여 성장을 가속화하려는 모택동의 혁명이념은 현실을 무시한 너무나 급진적이고 모험적인 정책인 것으로 판명됐다. 예컨대 지역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경작방식의 개혁은 오히려 생산량의 감소를 가져왔고, 계획의 분산은 노동력과 기타 자원의 효율적 운영을 불가능하게 했다.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의 실패는 모택동으로 하여금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는데 이후 등장한 인물이 당시 당의 제2인자였던 유소기(劉少奇)였다. 유소기의 조정·완화정책은 경제의 회복을 가져와 그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켜 주는 것 같았지만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으로 모택동에 의해 숙청을 당하게 됨으로써 권력은 다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넘어갔다. 유소기(劉少奇)·등소평(鄧小平)을 비롯한 우파 실무파를 숙청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1969년 4월 제 9기 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문화혁명을 일단 매듭짓고 임표(林彪)를 당부주석으로 승진시키면서 당규약에 그를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규정을 삽입했다. 그러나 문혁(文革)기간 동안 정치적 영향력이 급증한 군을 장악하고 있던 임표와 실질적인 중국의 실력자 모택동간에는 많은 문제에서 견해차를 보였다.이에 모택동은 강청(江淸)을 중심으로 한 4인방(4人幇)을 권력핵심부에 포진시킴으로써 임표를 제거하려 했다. 궁지에 몰린 임표는 1971년 9월 13일 모택동을 타도하려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고,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1970년대 초 문혁의 휴우증에서 벗어난 중국은 경제 활성화가 당면 과제로 떠오르게 됐다. 이에 실각한 등소평을 비롯한 많은 실무파들이 속속 복권되게 되고 이것은 기존의 권력을 잡고 있던 4인방과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4인방은 1976년 1월 총리 주은래(周恩來) 추모로 일어난 군중시위 사건인 천안문사건(4·5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등소평을 지목해 1967년에 이어 그를 다시 실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1976년 9월 9일 사망하게 됨에 따라 주은래를 뒤를 이어 제2인자로 있던 화국봉(華國鋒)이 4인방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게 된다. 화국봉은 4개 현대화계획이라는 대형 프로젝트 건설을 추진하여 중국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을 가졌지만 중공업에 치중한 경제정책은 상대적으로 경공업과 농업을 도외시 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한편 경제중심의 실용주의 노선 표방으로 등소평을 비롯한 실무파들이 다시 대거 복권하게 되고, 이는 화국봉(華國鋒)을 위시한 온건 혁명세력과 주은래노선을 계승한 등소평(鄧小平) 등 실무세력사이에 대립을 가져왔다.
양측은 서로 열띤 논쟁을 통해 상대방의 주장과 이념을 비방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모택동의 '단결혁명론(繼續革命論)'을 옹호한 화국봉보다는 사상을 해방하고 사실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앞을 보자 - 해방사상(解放思想), 실사구시(實事求是), 당결일치(團結一致), 향간전(向看前) - 라는 등소평의 개혁·개방노선이 전당공작(全黨工作)의 지도방침으로 채택됨에 따라 화국봉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고 등소평을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이 권력을 쥐 된다. 등소평은 당주석제를 폐지하고 총서기제를 부활하여 자기의 심복인 호요방(胡耀邦)을 총서기로, 조자양(趙紫陽)을 총리로 각각 임명했다. 등소평체제의 확립과 함께 중국은 경제의 대외개방과 농촌경제계획에 들어가 중국적인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견지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대외개방을 천명하게 됨에 따라 경제발전에 따른 정치발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보수파들은 이를 빌미로 개혁파를 맹공하게 되고 마침내 호요방(胡耀邦) 총서기가 물러나게 되면서 조자양(趙紫陽)이 총서기로 부각된다. 1989년 4월 15일 호요방(胡耀邦) 전(前)총서기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호요방에 대한 명예회복 및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이 발생하게 되고, 시민, 노동자, 지식인까지 이 시위에 참가하게 된다. 4, 5월에 걸쳐 민주화요구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천안문에는 지식인, 노동자, 일반시민, 학생 등 약 100만명이 연달아 대대적인 집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에 따라 온건파 조자양 총서기와 강경파인 양상곤(楊尙昆) 국가주석, 이붕(李鵬) 총리측이 대립하게 되고 여기에서 강경파의 우세로 1989년 6월 4일 새벽 계엄군이 천안문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던 학생, 시민들에 대한 무력진압을 전개한다. 시내 각처에서 시민과 계엄군의 충돌로 학생 36명을 포함한 319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부상자가 3,000명, 계엄군측 부상자 6,000명(당국발표)을 발생시킨 최악의 유혈사태가 발행했다.
천안문사태 이후 1990년 6월 제 13기 4중전회(中全會)서 조자양 총서기는 민주화시위를 지지,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 등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강택민(江澤民) 상해시 당서기 겸 정치국위원이 총서기로 선출된다. 11월 6∼9일의 5중전회(中全會)에서 등소평은 당중앙군사위 주석직을, 1990년에는 자신의 마지막 직책이던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강택민 총서기가 두 직책을 승계했다. 1990년 1월 11일, 북경시의 계엄령이 해제되고 천안문사태는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졌다.
천안문 사태와 소련의 붕괴로 보수파의 목소리가 커지자 개혁·개방체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1993년 3월 제 8기 전인대에서 개정된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개혁과 개방의 가속화를 촉구했다. 현재 중국은 등소평을 비롯한 개혁파가 추진하는 개방과 조정의 정책하에서 '현대화'·'민주화'·'문명화'·'사회의 강국'을 목표로 진군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서방 자본주의에 대해 과감하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개혁과 개방의 물결은 중국 사회 전반에 적지않은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산물들이 점차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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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09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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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18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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