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하루아침에 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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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기 전에

2. 로마인 이야기-율리우스 카이사르

3. 갈리아전쟁

4. 군사적인면

5. 정치적인면

6. 마치며

본문내용

4요약정리.
☞치안 정책
지금까지 로마에는 수도 경찰 같은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느 수도 경경찰을 창설하기로 마음먹었다. 치안 대책을 게을리 하면 유복한 집에서는 사설 경비를 갖추게 되고, 그것이 수도 치안에 중대한 폐해를 초래한다는 것은 클로디우스와 밀로의 폭력단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치안대책을 강구하는 것은 호위병을 데리고 다니기를 싫어한 카이사르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오노 나나미, 앞의 책(하), p.326요약정리.
☞교통대책
100만 명 안팎의 인구가 집중해 있으면, 도심인 포로 노마노나 장이서는 테베레 강 일대는 몹시 혼잡해지는 게 당연하다. 낮에 시내에서 가마를 탈 수 있는 것은 기혼부인과 여사제 뿐이었다. 짐수레가 해가 진 뒤부터 이튿날 해가 뜰 때까지만 다닐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 앞의 책(하), pp.326요약정리.
☞사치 금지법
사치를 방임하면 사람들 사이에 위화감을 자극하기 쉽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도가 지나친 사치를 금지했다. 최고권력자가 된 뒤에도 카이사르는 요리에 까다로운 주문을 다는 일도 없었고, 나온 요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불평하는 일도 없었다.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음식 투정을 하면, 음식이 마음에 안 들면 안 먹으면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시오노 나나미, 앞의 책(하), pp.327~328요약정리.
⑩ 카이사르의 포룸
포룸은 정치행정사법종교경제가 혼연일체가 되어 이루어지는 곳이다. 카이사르가 생각한 포룸은 포로 로마노의 축소형이었다.
카이사르는 정치와 군사에서 경쟁자였던 폼페이우스에게 공공건축면에서도 지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폼페이우스가 개발한 지역 바로 북쪽에 사입타 율리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민회 투표장 겸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카이사르는 테베레 강 근처에 반원형 석조 극장을 건설할 계획도 세웠다.
카이사르의 포룸에서도, 극장이나 회랑이나 회당이나 경기장에서도, 즐비한 원기둥 사이나에서드라라고 불린 반원형 공간이나 광장 중앙을 장식한 것은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만든 입상이었다. 로마에서 이런 종류의 예술 양식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도 이처럼 폭발적으로 늘어난 내수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카이사르는 건설만 한 게 아니라 파괴도 추진했다. 그것도 파괴한 자리에 새로운 건축물을 세우기 위한 파괴가 아니라 파괴만을 목적으로 하는 파괴였다.
로마는 기원전 6세기부터 제6대왕 세르비우스가 세운세르비우스 성벽(무라 세르비아니)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것을 카이사르가 파괴했다고 한다. 현대 로마의 옛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렐리우스 성벽(무라 아우레리아나)은 서기 3세기에 세워진 것이다. 그 무렵에는 팍스 로마노도 위태로워져 방비를 강화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반면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는 무려 300년 동안이나 방벽도 없이 지냈다는 얘기가 된다. 팍스 로마나의 완성자는 아우구스투스지만, 수도를 성벽으로 에워쌀 필요도 없을 만큼 평화로운 것이 로마가 지향하는 길임을 아우구스투스와 그후의 황제들에게 보여준 것은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가 성벽을 부순 것은 로마의 도심을 확장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벽이 없어도 평화를 유지 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시오노 나나미, 앞의 책(하), pp.331~339요약정리.
Ⅵ. 마치며...
역사란 승자가 자기한테 유리하게 쓴 기록이라는 믿음은 오래 전부터 정설로 통해왔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주장하곤 했는데, 앞으로 서술하는 내용은 내 주장을 입증하는 전형적인 예라고 하겠다. 제 7장의 서술은 패배자 쪽, 다시 말해서 반카이사르파가 남긴 사료만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료를 남긴 사림이 반카이사르파인 키케로이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 앞의 책(하), p.363.
시오노 나나미는 키케로의 편지를 중심으로 카이사르가 역사가 만든 영웅이 아니라 반대파까지도 인정하는 영웅임을 이야기한다.
먼저 역사가 승자가 자기한테 유리하게 쓴 기록이라는 이야기를 필자 역시도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가 승자를 위주로 하여 쓰여 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는 사람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만을 담을 수는 없다. 사실만을 서술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사실만이 쓰여진 것이 역사라고 한다면 역사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이다. 설령 거기에 개인적인 사상과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그 시대를 알아내고 사가의 생각과 의도와 승자의 의도를 알아내는 것이 진정한 역사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한 것과는 달리 키케로는 정치적 입장만 다를 뿐 카이사르와는 서로를 존중하는 친구였다. 그리고 키케로는 카이사르에게 힘들 때 많이 의지하고 이를 카이사르는 친절하게 받아 주었다. 그리고 아무리 반대파라고 할지라도 죽은 카이사르를 비난할 정도로 키케로가 잔인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에게는 반대파가 아닌 친구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반대파에 놓고 카이사르를 영웅화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다시 놀란 것은 카이사르의 됨됨이다. 역시 카이사르를 조금은 영웅화시키는 서술이기는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친절할 설명 역시도 놀라웠다.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우리를 로마세계로 인도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오노 나나미의 글을 읽는 것은 그 이유에서인 것 같다. 그리고 로마인들의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인기를 누리는 이유 역시도 그 시기 걸출한 영웅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현대화되어 있고 발달된 로마를 접할 때마다 감탄사가 나온다. 많은 이들이 이런 로마를 사랑하고 동경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를 소재로 한 글 역시도 사랑 받는 것 같다.
♣참고문헌♣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로마인 이야기 4권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한길사, 1998.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로마인 이야기 5권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한길사, 2002.
양병우외, 『대세계의 역사3―대로마제국고대의 인도』, 삼성출판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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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6페이지
  • 등록일2010.06.13
  • 저작시기2003.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8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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