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문화 - 건축과 토목을 중심으로..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철학이 주류를 이어 왔는데 이들은 기독교 사상의 성립에 크게 기여 하였다.
초기 로마인들의 근검 절약을 강조하는 도덕률에는 스토아의 극기·금욕의 사상이 일치되었고 로마의 세계 지배에는 스토아의 사해 동포사상이 적절하게 어울릴 수 있었다.
네로 황제의 스승으로 신의 섭리와 박애를 주장한 세네카, 그리스 노예출신으로 어록을 남긴 에픽테토스, 그리고 명상록을 남긴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세네카는 어려서 부모를 따라 로마에서 자라면서 변론술과 철학을 배웠다. 그는 웅변가로 성공하여 국가재무관이 되었으나, 클라우디우스 1세의 비(妃) 메사리나의 미움을 사서 41년 코르시카섬으로 추방되었다. 실의의 8년을 보내고 로마에 돌아온 뒤, 어린 네로의 스승과 국가법무관의 소임을 맡았고, 54년 네로가 제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었다. 한동안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였으나, 시대의 추이를 알고 네로의 과욕(過慾)에 위태로움을 느낀 나머지 62년 네로에게 간청하여 은퇴, 캄파니아에서 오로지 학문과 문필을 가까이 하며 거기에서 보다 큰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는 스스로 세속에 물들면서도, 끝내 인간이 인간다운 까닭은 올바른 이성 때문이라는 것과 유일의 선(善)인 덕
(德)을 목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는 스토아주의를 역설하였다. 65년 네로에게 역모(逆謀)를 의심받자 스스로 혈관을 끊고 자살하였다.
에픽테토스는 스토아인(人)으로서 철학자라기보다는 철인(哲人)이었다. 알려고 하기보다 지(知)에 의해 살려는 그의 입장을 잘 나타내는 것이 “인내하라, 단념하라”라는 표어이다. “우리들의 것과 우리들의 것이 아닌 것이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즉 우리들의 판단이라든가, 욕망 ·행위는 우리들의 자유이지만, 신체 ·재산 ·명성 ·권력 등은 필연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지 우리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인식하고 우리의 의지를 그것에 일치시키기 위한 ‘수련(修練)’이 철학이다. 자연이란 신의 의지의 실현이며, 철학하는 것은 ‘신의 종’이 되는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나는 신과 함께 선택하고, 신과 함께 원하며, 신과 함께 의지(意志)한다”고 하는 유명한 사상을 남겼다. 당시 대부분의 스토아는 학설을 절충하였으나 그는 특히 초기 스토아의 강건함을 견지하였다. 그는 같은 스토아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가톨릭교의 교부(敎父)들, B.파스칼과 그 밖의 근세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우렐리우스는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派)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명상록(冥想錄)》에는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여기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神的)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個物)·개인(個人)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理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게르만 족과의 전쟁중 도나우강 근처 진영에서 숨을 거두었다.
결언
로마의 문명은 후대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마의 건축은 비록 그 정신은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 형식만은 중세의 교회 건축에서 그대로 유지되었고,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조각 역시 거리와 공원을 장식하고 있는 기사상, 기념물로 세워진 아치와 원주, 정치가 및 장군의 석상 등에서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로마의 위대한 법학자들이 연구한 법 체계는 유스티누아스 법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그것은 중세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 더욱이 오늘날 유럽 대륙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채택된 법률체계는 로마법의 상당부분을 수용하고 있다.
또 다른 로마의 문학적 업적이 학문의 부활,( 12세기에 유럽으로 확산되어 르네상스에서 그 절정에 달했던, )에 영감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의식은 물론 조직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국가체제 및 종교 체계로부터 많은 부분을 받아 들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가 후세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은 그리스 문명을 서유럽에 전했다는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이후에 그리스적 이상으로 충만된 문화가 이탈리아에서 발달했다는 것은, 종전에 동방에서 그리스 지향적인 문명이 압도했던 사실에 비추어 동서간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로마가 진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 서북부(현대의 프랑스, 베네룩스 3국, 독일 서남부, 잉글랜드) 의 문화는 부족 적인 문화였다. 로마는 이 지역에 도시와 그리스적 이상을 가져다주었으며, 무엇보다도 고도의 분화된 도시 생활의 발달과 더불어 등장한 인간의 자유의 개념과 개인적 자율의 개념을 심어 주었다. 물론 자유의 이상은 실제로는 번번히 묵살되곤 했다. 그것은 로마의 노예제와 여성의 예속을 완화시키지도 못했고, 정복지에 대한 로마의 착취적 억압적 지배를 막아내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역사는 진정한 의미에서 서양 역사의 참다운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도서
세계문화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두산 세계 대백과 사전
로마문명사 도널드 R.더들리
세계문화사 이상현

키워드

로마,   문화,   건축
  • 가격2,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0.06.22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2124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