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미술사A+] 중국,도자기의 나라 (도자기의 분류, 도자기의 역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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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양미술사A+] 중국,도자기의 나라 (도자기의 분류, 도자기의 역사 소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1. 도자기의 분류
1-1 소성온도
(1) 토기 (clay ware)
(2) 도기 (Earthen ware)
(3) 석기 (Stone ware)
(4) 자기 (Porcelain)

2. 유약의 사용

3. 청자의 발명

4. 청자의 시대적 구분
4-1 진나라 (BC 221~206)
4-2 한나라(BC 206~AD 220)
4-2-1 한 대의 도자기
4-3 삼국, 육조 시대 (220~586)
4-3-1 삼국, 육조 시대의 도자기
4-4 수 시대 (581~617)
4-5 당 시대 (618~906)
4-5-1 당 대의 도자기
4-5-2 흑자
4-5-3 당삼채
4-6 오대십국 (907~960)
4-7 송 (960~1279)
4-7-1 송 대의 도자기
4-7-2 정요
4-7-3 수내사관요
4-7-4 가요
4-7-5 여요
4-8 원(1280~1365)
4-8-1 원 대의 도자기
4-8-2 청화
4-8-3 홍유자기

본문내용

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지역적으로는 북방의 유목민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등장과 함께 전성기 문화를 자랑하던 송나라가 위기에 처하였다. 북방지역이 쑥대밭이 되었고 인구 감소, 농촌 파괴, 정치적 불안감등으로 도자공들이 남쪽 양쯔강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남쪽에서 도자 공예가 발달하였다.
4-7-1 송 대의 도자기
다채로운 도자기들이 발달하는 이 시기에 특히 이름난 도자기를 굽던 가마를 5대 명요라고 하였다. 정요, 여요, 관요, 가요, 균요가 그것이고, 이 5대 명요는 각각 그 명성이 대단하여 이들 도자기는 황실용으로 특별히 제작을 하여 공납을 하였거나 아니면 오직 황실만을 위해 요가 운영되었다. 요에 따라 지방색을 띄고 있었는데 북방요는 대담한 실험적인 기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박력있게 깎아낸 디자인과 유약을 튀겨 뿌렸으며, 강한 색조를 선호하였다. 남방요는 온화하고 보수적이며 고풍스러운 형태를 간직하였다.
4-7-2 정요
정요는형요백자의뒤를이은자요체계이다. 원료 속에 풍부한 척성 성분을 함유했기 때문에 기물의 태체가 얇아도 변형되지 않았다. 우유빛을 내기도 하였으며 산화알루미늄과 산화티타늄의 유색이 상아빛을 내어 상아빛 백자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정요에서 생산한 백자는 뒷면에 유층이 배소할 때에 흘러내려서 그 흔적이 남았다. 줄과 같은 모양이 눈물과 닮아서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림 18. 백자운룡운반
4-7-3 수내사관요
그림 19. 청자관이병
북송이 망한 후에 남송의 정부는 북송의 제도를 답습하여 항주에 황실에만 자기를 공급하는 관요를 세우고 이를 남송관요라고 하였다. 문헌상 항주에는 두 개의 관요가 있었는데 하나는 남송 수내사관요이고 또 하나는 교단하신관요이다. 교단관요의 자기는 높은 성분의 철을 함유하고 환원된 화염에서 배송하여 태골이 흑색이나 흑갈색, 회갈색을 띈다. 태체는 치밀하고 태벽은 비교적 얇으며 청유를 발랐다. 관요청자의 유층은 옥과 비슷한 질감이 있어서 비교적 광택이 나면서 아름다웠다. 이에 반해, 수내사관요는 아직 요지가 발견되지 않고 ‘격고요론’이라는 책의 7권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4-7-4 가요
가요는중국의역사상계속그명성을누려왔다. 더욱이 가요의 자기는 희대의 보물로 여겨졌다. 그 조형은 간결하고 세련되었으며 고아하면서 제작이 정교하였다. 색조는 비교적 연한 편이었다. 그 특색은 몸체에 부서진 유리모양의 열문이 있었는데 그 조각의 크고 작은 것들이 서로 뒤섞여 큰 것은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작은 것을 황갈색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자기를 ‘금사철사’라고 명한다. 원인은 태와 유약의 원료가 가열되는 과정에서 서로 팽창계수가 달라 냉각 후에 유면에 갈라지는
그림 20. 가요쌍이병
무늬가 나타난 것이다. 자기의 유면이 파열된 것은 본래 공예 과정상의 결점이지만 그 갈라진 무늬가 아름다워서 일종의 천연적인 장식이 된 것이다.
4-7-5 여요
여요청자는북송의청자를대표하는걸출한것이었다. 태체가 비교적 얇고 재질이 세밀하였으며 향의 재와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제작규모가 상당하였으며 조형이 장중하고 호방했다. 이에 유층은 두껍고 유색이 하늘색이었다. 여요청자는 철분에 대하여 잘 파악함과 동시에 환원염의 조절을 아주 정확하게 하였는데 이는 북방의 청자공예가 성숙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여요는 관요로서 그 통제가 엄격하여 정부에서 고르고 남은 것만이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그래서 남송시기에는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으며 후에 전란으로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 21. 청자삼족준
4-8 원(1280~1365)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로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 칭키스 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층,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원이 들어서면서 경제 지배를 통한 정국운영은 더욱 심화 되었으나 통치가 안정되지 못하여 송 때의 유민들의 반항과 투쟁이 빈번하였다.
당시 원의 경제권을 장악했던 이슬람인들이 도자업에 크게 관여 했기 때문에 이슬람의 취향을 반영한 부분도 있다.
원 왕조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단명하였으며, 불명예스러웠을지 모르나, 미술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불확실한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고찰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흥미롭고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4-8-1 원 대의 도자기
원 대는 통치가 안정되지 못하여 송 때의 유민들의 반항과 투쟁이 빈번하였다. 이에 자계들은 쇠락하였고, 상대적으로 전란이 적은 남방에서 대부분의 도자 생산 활동이 이루어졌다. 남방은 비교적 생활이 안정적이였고, 원료도 풍부했기 때문에 자기제자업이 회복될 수 있었다. 송 대 기반위에 새로운 폼종을 개발해내어 해상교통이 편리했던 남방에서 수출도 매우 활발했다.
원 대의 지배자들은 도자업을 중시했는데 이는 부양자국을 설치하여 세금항목에 자과를 따로 두어 자기업을 관장했다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황제나 황후를 상징하는 용봉도안의 사용을 금하는 등의 규격 통제가 있었으나 민요에서 쉽게 발견 되어진다.
원대는 장식미술에서 퇴보했거나 답보상태를 유지한 시기로 생각되어 왔으나 이제는 반대로 혁신과 기술적 실험을 이룬 시대로 인식된다.
4-8-2 청화
청화는 백색의 바탕의 코발트 블루 무늬가 매우 인상적이다. 금속 코발트의 산화물로 그림을 그리고, 다시 백유를 칠한 다음, 가마에 넣고 고온의 환원염으로 구워서 만든다. 청화 자기는 이미 당 때 발명되어졌으나 이 때에 경덕진을 중심으로 대량생산 하였다.
그림 22. 청화길상문반
4-8-3 홍유자기
유약이 고루 발라져 있고, 전체가 홍색을 띄며 구리산화물을 사용한다. 제작법은 청화자기와 같으나 홍갈색으로 변하거나 빛깔과 광택이 어우러지지 않아 조악한 제품들이 많다. 청화자기보다는 소탈하나 매우 박력있는 모습이다.
그림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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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25
  • 저작시기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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