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언
2. 초기 로마사회(왕정기의 로마)
1)정치구조
2)왕정의 몰락
3. 로마공화정의 수립
1)공화정의 사회구조
2)공화정의 정치구조
4. 로마공화정의 성숙
1)신분투쟁 발생이유
2)신분투쟁 전개과정
3)신분투쟁의 종결
5. 로마공화정의 발전(영토 확장과 그 영향)
1)이탈리아반도의 통일과 그 영향
2)포에니 전쟁 및 그 영향
6. 로마공화정의 위기
1)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사회의 변화
2)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3)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결과
7. 로마공화정의 몰락
1)일인정치의 시작
2)삼두정치의 시작
8. 결어
2. 초기 로마사회(왕정기의 로마)
1)정치구조
2)왕정의 몰락
3. 로마공화정의 수립
1)공화정의 사회구조
2)공화정의 정치구조
4. 로마공화정의 성숙
1)신분투쟁 발생이유
2)신분투쟁 전개과정
3)신분투쟁의 종결
5. 로마공화정의 발전(영토 확장과 그 영향)
1)이탈리아반도의 통일과 그 영향
2)포에니 전쟁 및 그 영향
6. 로마공화정의 위기
1)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사회의 변화
2)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3)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결과
7. 로마공화정의 몰락
1)일인정치의 시작
2)삼두정치의 시작
8. 결어
본문내용
으나 결과적으로는 국고고갈과 로마인들의 나 태를 가중시킨다.
7. 로마공화정의 몰락
1) 일인정치의 시작
① 마리우스(BC 157~86 장군으로서 최초로 정치무대에 등장한다. 무직자나 무산자의 지원병으로서 직업적인 군대 를 새로 편성한다는 군사개혁을 단행하였다. 새로운 군대의 직업군인은 무장을 공급받고 봉급을 받으며, 16년간 복무를 마치면 보너스와 더불어 토지가 급여되어 정착할 수 있는 특권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로마의 군대는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장군에 대한 충성이 앞서고 장군의 사병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런 변질된 군인을 배경으로 장군들은 로마사회 내부의 갈등과 원로원의 무력화를 이용하여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 ② 술라(BC 138~78) 벌족파 출신으로 원로원의 반대로 제대병에 대한 토지분배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마리우스를 내세우려는 민중파를 숙청하였다. 공화정의 전통을 깨뜨리고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여(BC 82) 평민회와 호민관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축소시키면서 원로원 의원수를 600명으로 늘려 자파사람으로 충당했다.
→③ 폼페이우스(BC 106~48) 술라사후 그의 부하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는, 마리우스파의 세르토리우스와 스파르타쿠스의 잔당을 토벌하여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는 노예반란을 진압한 크라수스와 함께 기원전 70년에 집정관이 되어 술라의 반동적인 국제를 원상으로 환원시켰다.
공화정의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원로원이다. 그런데 이 원로원이 정복전쟁의 열매를 독점하고, 현상유지에 급급할 뿐 상황변화에 적적하게 대처할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또한 기원전 2세기 말부터 1세기 초에 걸친 내외의 위기에 처하여 무능과 부패상을 드러냄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공백상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군사령관 출신의 장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원로원이든 민중이든 저마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장군들에 의지하게 되고, 벌족파와 평민파의 투쟁은 장군들의 정권투쟁과 결합되어 복잡하고 치열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2) 삼두정치(triumvirate)의 시작
① 제 1차 삼두정치(Caesar 카이사르의 정책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노병에 대한 토지분재를 실시하고,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후 8년간에 걸쳐(BC 58~51)갈리아 정복에 전념하게 되었다. 갈리 아 정복은 카이사르 개인에게 있어서는 로마의 정권을 장악하는데 발판이 되었고, 고대사 흐름에서는 지중해를 무대로 발전하였던 그리스로마문화가 비로소 유럽내륙에 이식되어 깊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갈리아로 출발하기 전 클로디우스를 호민관으로 당선시켜 로마의 동정을 살핀다. 클로디우스는 키케로와 소(小)카토를 로마에서 추방하고, 가난한 시민에 대하여 곡물의 무상배급을 실시하였다. 또한 로마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갈 등은 근본적인 해결 대신에 정복사업으로 획득한 토지와 돈으로 제대병에 대한 토지분배로 써 자유농민을 부분적으로 다시 창출하는 한편, 빈민에 대한 곡물의 무상배급과 각종의 경 기와 시합 등을 무료 관람이라는 이른바 빵과 서커스 정책으로 해결을 보았다.
, Pompeius, Crassus)
동방원정 후 귀국한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해산하고, 제대병에 대한 토지분배를 원로원에 요청하였으나, 원로원은 승인해주지 않았다. 이때 로마의 귀족가문출신인 카이사르 (BC100~44)가 실의에 젖어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끌어 들여 제1차 삼두정치가 시작 되었다.
② 제 1차 삼두정치의 해체와 카이사르의 독재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의 사망과 크라수스가 동방원정에서 전사 한 결과 삼두정치는 자연 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카이사르에 반감을 가져왔던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인기상승을 질투하던 폼페이우스를 단독 집정관이라는 전례 없는 자리에 앉혀 카이사르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기원전 49년 초 원로원은 카이사르에 소환명령을 내리자, 카이 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란 말과 함께 자신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로마로 진격하여 폼페이우스를 격파하고 독재 권력을 확립하였다. 종신독재관이 된 카이사르는 반대세력에 대해서는 관대한 입장을 보였고 빈민문제처리, 달력 개정(율리우스력), 라틴 시민권 부여 등 로마의 재건과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공화정에 미련을 갖는 세력은 여전히 존재했 고, 그 대표자격인 브루투스에 의해 기원전 44년 3월에 암살당하였다.
2) 제 2차 삼두정치(Octavianus, Antonius, Lepidus)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BC 82 ~ 30), 옥타비아누스(BC 63 ~ AD 14)는 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성립시켰다. 그 결과 카이사르 살해범 처벌자 처리로 인해 900명으로 늘 어 났던 원로원의원 중 300명과 에퀴테스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원래가 상황의 필요성에 의한 산물이었기에 기원전 36년 레피두스가 3두에서 탈락한 후 옥타비아누스가 서방, 안토니우스가 동방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안토니 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자웅을 겨루었고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안 토니우스는 자결하고 로마는 황제정치(제정)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8. 결어
지금까지 로마 공화정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몰락에 대한 내용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로마 공화정 시기에 있어 로마인들은 비록 무력으로써 주변의 식민지를 굴복 시켰지만 식민지에 대하여 평화 유지 및 효율적 관리를 통하여 식민지에서 얻어지는 막대한 재정적 후광을 뒤 업고 로마의 공화정을 더욱더 발전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천년을 갈 것 같던 로마의 공화정도 지도부의 지도력과 결단력이 절실히 요구되던 시기에 원로원이 현실에 맞는 정치개혁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파 간의 경쟁과 개인적 이익추구에 몰두한 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은 공화정도 몰락하고 로마의 제정정치(황제정치)시대를 맞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참고문헌
허승일, <로마 공화정>,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5
김창성, <세계사 산책>, 솔출판사, 2003
7. 로마공화정의 몰락
1) 일인정치의 시작
① 마리우스(BC 157~86 장군으로서 최초로 정치무대에 등장한다. 무직자나 무산자의 지원병으로서 직업적인 군대 를 새로 편성한다는 군사개혁을 단행하였다. 새로운 군대의 직업군인은 무장을 공급받고 봉급을 받으며, 16년간 복무를 마치면 보너스와 더불어 토지가 급여되어 정착할 수 있는 특권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로마의 군대는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장군에 대한 충성이 앞서고 장군의 사병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런 변질된 군인을 배경으로 장군들은 로마사회 내부의 갈등과 원로원의 무력화를 이용하여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 ② 술라(BC 138~78) 벌족파 출신으로 원로원의 반대로 제대병에 대한 토지분배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마리우스를 내세우려는 민중파를 숙청하였다. 공화정의 전통을 깨뜨리고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여(BC 82) 평민회와 호민관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축소시키면서 원로원 의원수를 600명으로 늘려 자파사람으로 충당했다.
→③ 폼페이우스(BC 106~48) 술라사후 그의 부하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는, 마리우스파의 세르토리우스와 스파르타쿠스의 잔당을 토벌하여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는 노예반란을 진압한 크라수스와 함께 기원전 70년에 집정관이 되어 술라의 반동적인 국제를 원상으로 환원시켰다.
공화정의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원로원이다. 그런데 이 원로원이 정복전쟁의 열매를 독점하고, 현상유지에 급급할 뿐 상황변화에 적적하게 대처할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또한 기원전 2세기 말부터 1세기 초에 걸친 내외의 위기에 처하여 무능과 부패상을 드러냄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공백상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군사령관 출신의 장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원로원이든 민중이든 저마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장군들에 의지하게 되고, 벌족파와 평민파의 투쟁은 장군들의 정권투쟁과 결합되어 복잡하고 치열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2) 삼두정치(triumvirate)의 시작
① 제 1차 삼두정치(Caesar 카이사르의 정책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노병에 대한 토지분재를 실시하고,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후 8년간에 걸쳐(BC 58~51)갈리아 정복에 전념하게 되었다. 갈리 아 정복은 카이사르 개인에게 있어서는 로마의 정권을 장악하는데 발판이 되었고, 고대사 흐름에서는 지중해를 무대로 발전하였던 그리스로마문화가 비로소 유럽내륙에 이식되어 깊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갈리아로 출발하기 전 클로디우스를 호민관으로 당선시켜 로마의 동정을 살핀다. 클로디우스는 키케로와 소(小)카토를 로마에서 추방하고, 가난한 시민에 대하여 곡물의 무상배급을 실시하였다. 또한 로마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갈 등은 근본적인 해결 대신에 정복사업으로 획득한 토지와 돈으로 제대병에 대한 토지분배로 써 자유농민을 부분적으로 다시 창출하는 한편, 빈민에 대한 곡물의 무상배급과 각종의 경 기와 시합 등을 무료 관람이라는 이른바 빵과 서커스 정책으로 해결을 보았다.
, Pompeius, Crassus)
동방원정 후 귀국한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해산하고, 제대병에 대한 토지분배를 원로원에 요청하였으나, 원로원은 승인해주지 않았다. 이때 로마의 귀족가문출신인 카이사르 (BC100~44)가 실의에 젖어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끌어 들여 제1차 삼두정치가 시작 되었다.
② 제 1차 삼두정치의 해체와 카이사르의 독재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의 사망과 크라수스가 동방원정에서 전사 한 결과 삼두정치는 자연 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카이사르에 반감을 가져왔던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인기상승을 질투하던 폼페이우스를 단독 집정관이라는 전례 없는 자리에 앉혀 카이사르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기원전 49년 초 원로원은 카이사르에 소환명령을 내리자, 카이 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란 말과 함께 자신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로마로 진격하여 폼페이우스를 격파하고 독재 권력을 확립하였다. 종신독재관이 된 카이사르는 반대세력에 대해서는 관대한 입장을 보였고 빈민문제처리, 달력 개정(율리우스력), 라틴 시민권 부여 등 로마의 재건과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공화정에 미련을 갖는 세력은 여전히 존재했 고, 그 대표자격인 브루투스에 의해 기원전 44년 3월에 암살당하였다.
2) 제 2차 삼두정치(Octavianus, Antonius, Lepidus)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BC 82 ~ 30), 옥타비아누스(BC 63 ~ AD 14)는 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성립시켰다. 그 결과 카이사르 살해범 처벌자 처리로 인해 900명으로 늘 어 났던 원로원의원 중 300명과 에퀴테스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원래가 상황의 필요성에 의한 산물이었기에 기원전 36년 레피두스가 3두에서 탈락한 후 옥타비아누스가 서방, 안토니우스가 동방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안토니 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자웅을 겨루었고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안 토니우스는 자결하고 로마는 황제정치(제정)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8. 결어
지금까지 로마 공화정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몰락에 대한 내용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로마 공화정 시기에 있어 로마인들은 비록 무력으로써 주변의 식민지를 굴복 시켰지만 식민지에 대하여 평화 유지 및 효율적 관리를 통하여 식민지에서 얻어지는 막대한 재정적 후광을 뒤 업고 로마의 공화정을 더욱더 발전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천년을 갈 것 같던 로마의 공화정도 지도부의 지도력과 결단력이 절실히 요구되던 시기에 원로원이 현실에 맞는 정치개혁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파 간의 경쟁과 개인적 이익추구에 몰두한 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은 공화정도 몰락하고 로마의 제정정치(황제정치)시대를 맞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참고문헌
허승일, <로마 공화정>,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5
김창성, <세계사 산책>, 솔출판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