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시작가론<<책속의 홍대용 부분 요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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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홍대용론

1. 두 개의 시경론

2. 「詩傳辦疑」

3. 詩經論과「詩序」의 토론과정

4. 시와 관련한 작업들

마무리

본문내용

에 취후(醉後)에 높이 앉아
갈석(碣石)을 발로 박차 발해를 마신 후에
진시황 미친 뜻을 칼 짚고 웃었더니
오늘날 초초행색이 뉘 탓이라 하리오.
비록 13줄 밖에 안되는 짧은 노래지만, 국문가사의 전통을 잘 익힌데다 중원땅에 오른 실학자의 감격이 잘 나타나 흠잡을 데 없다. 게다가 이 『을병연행록』에는 수십편에 달하는 하시에 일일이 훌륭한 언해를 달고, 가끔 부녀자들을 위해서 시의 해설까지 곁들인 곳도 없지 않다. 그의 언해가 훌륭한 것은 그가 원시의 각 단어를 빠짐없이 성실히 따라 새기면서도 시의 율격과 뜻을 충실히 드러낸 곳에 있다. 이것은 언해시를 읽는 맛에서 『두시언해』의 모범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한문연기를 새긴 국역본의 번역과 비교하면 홍대용의『을병연행록』의 원 언해의 시번역이 더욱 훌륭하게 두드러진다. 언해에서는 특히 각 시구의 주어와 서술어를 바로 찾아 새겨서 원시의 뜻을 옮김에 소홀함이 없다. 이것은 시가 노래여야 하며 노래는 정을 꾸밈없이 움직여 말로 나타내는 것이 라는 그의 시론 시의식을 실천적으로 이룩한 작업이다.
「대동풍요시」는 그의 시의식을 가장 뚜렷한 논리와 아름다운 문장으로 전해주는 시론의 결론이다.
노래【歌】란 그 情을 말로 나타낸 것이다. 정이 말에 움직이고 말이 글로 이루어지는 것을 노래라 한다. 巧拙을 버리고 선악을 잊으며, 자연을 따르고 天機를 말하는 것이 노래로써 좋은 것이다. (歌者 言其情也 情動於言 言成於文 謂之歌. 舍巧拙 忘善惡 依乎自然 發乎天機 歌之善也)
이 「대동풍요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조리를 세운 글이다. “노래란 그 정을 말로 나타낸 것이다.”하는 머릿 대목부터 “詩敎의 망함이 극도에 이르게 된 것이다”하는 곳까지는 주로「시경」과 중국의 시교가 망하게 된 내력을 밝혔다. 다음으로 “조선은 본디 동방의 오랑캐이다.” 하는 중간 대목에서 “시교가 위 아래에 통한다 함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하는 곳까지는 주로 조선 노래를 중국의 「시경」에 비기면서 그 가치를 평가하는 대목이다. 마지막 몇줄에 걸쳐서 『대동풍요』를 엮은 내력과 그 자리매김, 그리고 『시집전』의 정신과 합치시킨 대목이다. 서민들의 노래인 대동풍요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위해서 「국풍」과 비교하고, 다시 진선진미한 「강구요」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천기를 잃은 사대부의 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서민의 노래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는 정과 말이 하나인 자연적인 노래를 좋은 노래라 하고, 시와 노래가 나뉘이며 정과 글이 서로 응하지 않은 인위적 시를 비판했다. 그러므로 그가 강조하는 바는 자연과 천기의 조화, 꾸밈없이 정이 나타난 노래에 있는 것이며, 반드시『시경』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 또한 그의 실학의 정신으로 이어지는 문학사상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홍대용의 시의식은 이 글의 끝 대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詩敎를 전제로 깔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경의 교화론적 전통은 주자주의를 택한 고려말 이후 조선조 유학의 한전통이었고, 그러면서 한편으로 주자와는 달리 情의 실체를 心이나 性과 대등하게 끌어올리는 조선 18세기 시론의 맥락을 뚜렷이 잇고 있다. 그는 양반에 속하면서도 서민의 생활과 그들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문학을 바라보았다. 그러기 때문에 양반들의 말과는 다른 거리의 상말로 엮은 노래가 가치 있게 보였고, 그들의 노래가 천기를 잃은 양반의 시보다 낫다고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홍대용이 『시경』에 모범을 두면서도 중국 시사의 전통을 자국 서민의 노래의 보기로써 비판하는 학문적 자각은 중요한 뜻을 지닌다. 기일원론이 이룩한 자각이며, 역외춘추의 역사의식이 이룬 도달점이었다. 이런 자각의 의의는 金萬重이나 18세기 초기 가집들에 보이는 시의식에 이어지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연과 천기에 바탕을 둔 그의 실학론 학문사상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할 일이다.
마무리
조선의 18세기는 역사상 크게 변화를 겪은 시대였고, 그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려진 바와 같다. 이런 변화의 시대를 살았던 홍대용은 그 스스로 학문을 통해서 현실의 개혁에 실천적으로 몸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朴趾源 등 뜻을 같이 하는 한 무리의 선비들과 함께 굳어져버린 조선주자학에 대하여는 명분론을 극복할 변화와 사상을 추구하면서, 밑으로는 현실을 바로 보고 그것을 바꾸어 가는 실천적 방향과 손을 잡고 있었다. 이런 현실감각을 가진 실학자에게는 문장학도 또한 극복되어야 할 비판의 대상이었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과제로서 관심의 대상이었다.
홍대용 또한 유학자로서 문학적 교양을 갖춘 사람이면서도, 시의식은 특별한 데가 있었다. 그의 시의식은 경학관과 관련된 것이었고, 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천기론적 서민문학 존중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가 주자의 시경론을 옹호하면서도 그의 교화론적 관점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그의 학문적 자각으로 인정된다. 주자의 교화론적 시경론은 그의 심성론에 이어져 있으면서 시의 비판적 의의를 부인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홍대용에게 있어서 현실적 성정론으로 극복해야 할 대목이었다. 이런 극복의 방식이 「대동풍요서」에서 서민시가를 옹호하는 천기론적으로 나타났고, 그의 문학이론이 천기론에 참을 추구하는 기일원론적 실학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는 한시의 작가가 아니다. 20수 남짓한 한시와 13줄의 국문가사 한편이 그가 남겨놓은 시작의 전부이고, 약간 펴보인 시경론은 그가 보인 경학적 학문론의 한 가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중년 이후에 비로소 古 詩 공부에 관심을 기울였던 사실을 여기저기 고백한 바있다. 또 반드시 온후한 文心으로 바탕을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가 추구했던것은 天機요 자연스러운 성정이며, 시에 있지 않았다. 그가 모범으로 삼았던 것은 朱子가 아니며, 더구나 주자의 시론은 더욱 아니었다. 그의 시정신은 참을 추구하는데 있었고, 이것이 약간은 시경론에서 「대동풍요서」로 이어지는 그의 참문학의 정신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 뿐 아니라, 성정론과 역외춘 추론과 기일원론등 모든 영역에 이어지는 그의 학문론과 실학사상을 나타내는 한 표현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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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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