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문제 제기
2. 맥루언의 시대 구분
3. 미디어란 무엇인가?
4. 미디어와 감각성의 탐구
5. 감각비율의 조화로의 이행
2. 맥루언의 시대 구분
3. 미디어란 무엇인가?
4. 미디어와 감각성의 탐구
5. 감각비율의 조화로의 이행
본문내용
문제들을 자신의 내면 안으로 돌려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하여 촉각성의 강조는, 문자 시대의 시각성의 강조로 인한 감각마비로 급속하게 변화하는 시대에 대처했듯이, 다감각적인 촉각성 역시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시대와 문명의 혼란과 아노미 상태에서 혼돈과 혼란을 겪어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게 촉각이라는 단일감각을 앞세워 다른 감각들을 마비시키고 자기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탈근대적인 것이 탈근대적인 것 재탈출의 필요성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이렇듯 비현실적으로 촉각성이 발달하게 되고, 시·공간의 압축으로 인해 생겨난 인간과 인간과의 거리감에 대한 분별없음은, 자신이 사소하게 던져버린 돌멩이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가능적 대안의 모색
철학적 배경이 다르지만, 최근에 서구에는 ‘정의’에 관한 담론의 유행과, 불교에 대한 재조명을 이룩하고 있다고 본다.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두 가지의 담론에는 근대성의 문제들에서 탈피해 보고자 하는 서구인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어 보인다.
근대성의 안에 인간은 개인화되고, 세속화되며, 상품화되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급속한 문명 속도의 흐름에 발맞추어 가지 못하는 도덕이론의 형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점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모든 틀이 바로 맥루언이 이야기한 것과 같이 미디어에서 비롯되고, 미디어를 통해서 해결 가능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술 발전을 토대로 더 많은 참여가 가능해졌으며,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일종의 힘과 권위를 부여받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미디어가 가지는 내용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면, 지금은 우리가 내용을 파악하는 방법을 알고, 감각 비율이 회복된 상태에서 미디어를 적극 수용하고 이용하여,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뒷받침은 바로 미디어의 역할이며, 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른 것은 바로 일종의 교육에서 이루어질 것 같다. 우리가 이미 미디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디어를 우리의 하나의 감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면, 인간과 대상간의 그 중간에 있는 그 중간성이라는 힘을 최소화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을 인간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미디어를 제어하는 힘, 맥루언의 논의식으로 감각 비율을 적정 수준으로 꾸준하게 유지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미디어에 대한 올바른 고찰, 교육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과 세계와의 유기체적 통일은 바로 이 미디어에 대한 교육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일종의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습관화 교육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미디어를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미디어의 문법화과정을 거치자는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미디어의 문법화에 대해서 소홀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신문, 텔레비전, 영화, 라디오와 같은 상업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는 미디어에 대해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반면 그에 대한 대안책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이전 정부에서 일종의 시도가 있어왔으나, 그것의 선호에는 상관없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이 문법화가 기존의 문자문화 시대의 문법화와 질서에 따르는 것에 민감하게 대응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미디어의 힘을 가지고 있는 미디어 권력자들에 의해서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미디어의 문법화가 이데올로기화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육의 주체는 그렇다면, 미디어를 생산하는 힘을 가진 권력자들 너머에 있는 우리 사회의 통치자들의 교육에서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통치자들부터 미디어의 이해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참고문헌
양해림, “매체의 해석학 -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중심으로 -”, 해석학연구, 18권, 한국해석학회 2006.
오창호, “맥루한(M. McLuhan)과 벤야민(W. Benjamin) : 탈근대적 커뮤니케이션 양식에 대한 탐구”, 한국언론학보 48권 3호, 한국언론학회 2004.
마셜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 김성기·이한우 옮김, 민음사, 2005.
그리하여 촉각성의 강조는, 문자 시대의 시각성의 강조로 인한 감각마비로 급속하게 변화하는 시대에 대처했듯이, 다감각적인 촉각성 역시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시대와 문명의 혼란과 아노미 상태에서 혼돈과 혼란을 겪어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게 촉각이라는 단일감각을 앞세워 다른 감각들을 마비시키고 자기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탈근대적인 것이 탈근대적인 것 재탈출의 필요성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이렇듯 비현실적으로 촉각성이 발달하게 되고, 시·공간의 압축으로 인해 생겨난 인간과 인간과의 거리감에 대한 분별없음은, 자신이 사소하게 던져버린 돌멩이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가능적 대안의 모색
철학적 배경이 다르지만, 최근에 서구에는 ‘정의’에 관한 담론의 유행과, 불교에 대한 재조명을 이룩하고 있다고 본다.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두 가지의 담론에는 근대성의 문제들에서 탈피해 보고자 하는 서구인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어 보인다.
근대성의 안에 인간은 개인화되고, 세속화되며, 상품화되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급속한 문명 속도의 흐름에 발맞추어 가지 못하는 도덕이론의 형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점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모든 틀이 바로 맥루언이 이야기한 것과 같이 미디어에서 비롯되고, 미디어를 통해서 해결 가능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술 발전을 토대로 더 많은 참여가 가능해졌으며,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일종의 힘과 권위를 부여받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미디어가 가지는 내용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면, 지금은 우리가 내용을 파악하는 방법을 알고, 감각 비율이 회복된 상태에서 미디어를 적극 수용하고 이용하여,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뒷받침은 바로 미디어의 역할이며, 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른 것은 바로 일종의 교육에서 이루어질 것 같다. 우리가 이미 미디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디어를 우리의 하나의 감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면, 인간과 대상간의 그 중간에 있는 그 중간성이라는 힘을 최소화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을 인간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미디어를 제어하는 힘, 맥루언의 논의식으로 감각 비율을 적정 수준으로 꾸준하게 유지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미디어에 대한 올바른 고찰, 교육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과 세계와의 유기체적 통일은 바로 이 미디어에 대한 교육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일종의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습관화 교육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미디어를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미디어의 문법화과정을 거치자는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미디어의 문법화에 대해서 소홀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신문, 텔레비전, 영화, 라디오와 같은 상업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는 미디어에 대해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반면 그에 대한 대안책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이전 정부에서 일종의 시도가 있어왔으나, 그것의 선호에는 상관없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이 문법화가 기존의 문자문화 시대의 문법화와 질서에 따르는 것에 민감하게 대응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미디어의 힘을 가지고 있는 미디어 권력자들에 의해서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미디어의 문법화가 이데올로기화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육의 주체는 그렇다면, 미디어를 생산하는 힘을 가진 권력자들 너머에 있는 우리 사회의 통치자들의 교육에서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통치자들부터 미디어의 이해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참고문헌
양해림, “매체의 해석학 -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중심으로 -”, 해석학연구, 18권, 한국해석학회 2006.
오창호, “맥루한(M. McLuhan)과 벤야민(W. Benjamin) : 탈근대적 커뮤니케이션 양식에 대한 탐구”, 한국언론학보 48권 3호, 한국언론학회 2004.
마셜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 김성기·이한우 옮김, 민음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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