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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문학의 정의

Ⅱ. 문학의 사회성

Ⅲ. 문학과 6월항쟁

Ⅳ. 문학과 TV드라마(텔레비전드라마)

Ⅴ. 문학과 뷔히너문학상

Ⅵ. 문학과 판타지소설

Ⅶ. 문학과 최수철문학

참고문헌

본문내용

초월적 중심부가 지배하는 폭력적인 이항대립체계와 그것에 편승하여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인간주체가 날뛰는 곳이다. 최수철은 닫힌 공간에서 진공이라는 열린 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적 전략을 인간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에서 찾는다. 그의 인식 전환은 라캉의 선험적 주체 부정론에 닿아 있다. 라캉은 인간이 선험적으로 이성적 주체임을 부정한다.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쪼개져 있으며, 의식은 언어법칙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무의식에 의해 지배된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언어로 매개되는 사회문화규범체계(상징계)에 진입하면서 무의식을 억압당한 채, 그 체계를 지배하는 이성중심주의 논리에 길들여져 스스로를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성적 주체라는 인식은 이성중심체제에 의해 조작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이 선험적이고 이성적인 주체라고 자처할 때, 그의 인식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며 자폐적인 것이 되며, 그 결과 지배체제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가능해진다. 지배체제는 그런 무비판적인 인간 주체를 양산함으로써 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항대립체계에서 인간은 살아있는 만물의 주체가 아니다. 단지 제도에 의해 길들여져, 그것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자동인형 내지 도구화된 부속품, 혹은 사물이나 광물질과도 같은, 한갓 ‘밀랍인형’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허깨비나 껍데기로 앉아 있는 그 사내의 귓구멍을 통해 누군가가 뜨거운 촛농 같은 것을 흘려 넣거나 하여 살아있는 인간을 그대로 닮은 하나의 밀랍인형을 만들어 놓은 듯 했다. 하지만 어느 면에서는 그 사내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사람이 결국 밀랍인형인 셈이었다.
주체적인 의지라곤 없는, 한갓 인형에 불과한 인간주체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실상 그러한 삶은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썩은 물에서 언젠가는 질식사 할 고기, 마치 고래뱃속에서 소화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잡어’들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 잡어들은 서로가 주체라는 “안과 밖의 일차원적 구별의식”에 의해 서로 대립한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짐승 같은 모습을 노출하면서, 점차 그들은 파국으로 치닫는데, 그 귀결점이 이성적 인간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된 처참한 인간 살육의 현장, 곧 ‘아우슈비츠의 지옥 같은 가스실’ 혹은 ‘게르니카의 그림’같은 상태로 귀착된다.
그의 눈앞에는 아비뇽의 여인들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는 게르니카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여기저기에 함부로 널려 있는 인간의 지체들, 손과 발, 머리들, 해골들, 대퇴부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결국 이항대립체계를 파괴하고 열린 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간 주체를 해체하여야 한다. 의식과 무의식으로 쪼개진 인간은 무의식의 욕망이 타자(객관세계나 인간)에 의해 충족될 때 자신의 개체성(identity)을 확립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때, 그리하여 타자에로의 인식이 열릴 때, 그 때 이항대립체계의 구조적 모순을 간파할 수 있고, 이항대립이 해체된 열린 공간으로 지향도 가능하다.
사회적이라거나 정치적인 면을 모두 제외하고 단순히 개인에 관계된 면으로만 볼 때, 같은 모순 된 존재로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속을 제도적인 힘을 이용하여 들여다보고 그의 개인성을 말살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어차피 누구나 조금씩은 화해와 타협을 이루고 있기 마련인 내적인 자아와 외적인 자아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 그 둘을 걷잡을 수 없이 충돌하게 만드는 것, 과연 그 누구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 것일까? 그런 폭력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분노와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는 다름 아닌 의식과 무의식을 의미한다. 의식과 무의식이 화해와 타협을 이룬다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쪼개져 있는 인간이 타자와 상호보족적인 관계를 맺을 때 가능하다. 그런데 사회구조가 의식과 이성만을 중심부라 강요하면서 폭력적인 측면을 띨 뿐만 아니라, 인간들마저 주체라 자처하고 그러한 폭력성에 편성할 때, 그 속에서 상호보족적인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결국 인간 주체를 해체하고 타자에로의 인식을 전환할 때, 이항대립이라는 폭력적인 사회구조 및 인간주체의 모순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닫힌 공간의 병폐를 파헤치고 그 극복을 통해 열린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주체의 해체를 통해 최수철이 도달한 진공은 “사물들이 진공 속에서처럼 중력을 떨쳐버리고서 훨씬 큰 자유로움을 얻게 되는” 곳이다. 그곳은 ‘시간이 우주의 미아’가 된 곳이며, ‘안과 밖이 뒤집힌 공간’으로, 이항대립체계가 적용되지 않는 곳이다. 따라서 정상인과 난장이는 이 진공 속에서 동등한 관계를 이루게 된다. 진공 속은 걷는 것이 필요하지 않기에 정상인과 난장이의 차이는 단지 다리의 ‘길고 짧음의 차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공 속은 ‘의식의 정전상태’ 혹은 ‘꿈과 현실의 완충지대, 비무장지대’로, 의식적, 이성적 주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하는 인간만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곳이다.
이윽고 진공 안은 무수한, 온갖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답답함을 느낄 수 없었다.누군가가 그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는 그에게 미소로써 답했다. 그때 그는 자신이 방금 지은 미소가 자신의 얼굴에 그대로 박혀버리는 것을 느꼈다. 흰색 벽의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계속하여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벽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중략) 그러면서 그는 진공 속으로 들어서듯 진공을 벗어났다. 혹은 진공을 벗어나듯 진공 속으로 들어섰다.
참고문헌
◈ 김주원, 6월항쟁의 이중적 성격과 민주주의 공고화의 문제, 논문
◈ 김영민, 이념과 문학의 길-탄생 100주년을 맞는 문인들을 통해 바라본 문단 구도
◈ 김진량(2001), 판타지 소설, 한양대학교출판부
◈ 이동하(1987), 문학의길, 삶의 길, 문학과지성사
◈ 최수철, 문학과 6월 항쟁 TV드라마 뷔히너문학상, 판타지소설
◈ 최수철(1985), 공중누각,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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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3.1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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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5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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