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홀로코스트영화]인생은 아름다워+줄무늬파자마를입은소년
본문내용
<땅을 파서 안으로 들어가려는 브루노>
들고 슈무엘을 찾는다. 삽을 이용해 땅을 파고, 슈무엘에게 건네 받은 줄무늬 포로복을 입고 포로모자로 머리카락을 감춘 브루노는 어느 새 감쪽같은 유대인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수용소 안으로 무사히 진입한 브루노는 슈무엘과 함께 막사 이 곳 저 곳을 뒤지며 슈무엘의 아버지를 찾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그들의 모험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독 가스실로 끌려 가는 사람들의 틈에 섞여 두 꼬마는 독 가스실에 들어가게 되고, 결국 어린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브루 <가스실안의 브루노와 슈무엘>
노의 행방을 좇던 그의 아버지가 독가스실로 향하지만 한발 늦은 후였고,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 속에 그의 아들이 있음을 절규하며 이 영화는 막을 내린다.
Ⅲ. 맺음말
이 영화를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과연 인간의 이성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란 생각이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현명한 동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겠지만 그 동안 있어왔던 전쟁 속에서의 무분별한 민간인 학살이나 2차세계 대전에서의 홀로코스트를 되돌아 본다면 인간이 정말 다른 동물들 보다 이성적인 존재가 맞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진정 이 지구상에 인간만큼 자신의 종족을 많이 살해하는 종이 또 어디 있을까? 그토록 사납다고, 말하는 호랑이와 사자를 같은 곳에서 살게 한 사파리에서도 싸움을 통한 죽음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전쟁은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아이러니한 일 중 하나이다. 그리고 전쟁속의 인간들에게 이성이란 것은 어쩌면 본능에 의해 지워진 잊어버린 기억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보고나자 그러한 생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비록 영화이기는 했지만 마치 내가 20세기 초반으로 돌아간 것 같았고,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라는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사실 나는 실제로 예전에 들었던 교양과목 수업시간에 홀로코스트 관련 실제 사진들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함과, 충격에 할 말을 잃었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설치한 소각로, 독가스를 품어 대량 학살하는 샤워실, 유대인을 죽이기 전 뽑은 금니 등을 보며, 히틀러가 과연 사람이었는지 의심했다.
비록 이 영화가 그동안의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다르게 한 어린이의 시각에서 조금은 완곡한 표현으로 역사적 비극을 묘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잔인함은 퇴색되어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두 꼬마의 우정이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되었고, 피해자 중의 한 명이 바로 독일인이라는 사실이 이 영화는 유대인의 비극이 아닌 인류의 비극을 묘사한 것으로 보였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는 종종 반복된다고 말한다. 단적인 예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많은 사람들은 반성을 했고, 다시는 이런 야만적인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것은 1차 세계대전 보다 더 더욱 잔인하고, 지독했던 비극이었다. 이처럼 인간은 언제든 이성을 잃고 비극을 향해 치닫을 위험을 안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전 인류의 비극을 직시하고, 또 다시 이러한 비극이 발생되지 않도록 반성해야 한다. 더군다나 첨단과학으로 인해 대량살상무기가 많이 생산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이러한 인간의 자각은 더욱 더 절실하다. 피 땀 어린 많은 이들의 수고로움과 노력으로 탄생한 첨단과학이 인간을 죽이는 살상무기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현실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이제 우리 모두 반성하여 이 영화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들고 슈무엘을 찾는다. 삽을 이용해 땅을 파고, 슈무엘에게 건네 받은 줄무늬 포로복을 입고 포로모자로 머리카락을 감춘 브루노는 어느 새 감쪽같은 유대인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수용소 안으로 무사히 진입한 브루노는 슈무엘과 함께 막사 이 곳 저 곳을 뒤지며 슈무엘의 아버지를 찾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그들의 모험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독 가스실로 끌려 가는 사람들의 틈에 섞여 두 꼬마는 독 가스실에 들어가게 되고, 결국 어린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브루 <가스실안의 브루노와 슈무엘>
노의 행방을 좇던 그의 아버지가 독가스실로 향하지만 한발 늦은 후였고,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 속에 그의 아들이 있음을 절규하며 이 영화는 막을 내린다.
Ⅲ. 맺음말
이 영화를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과연 인간의 이성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란 생각이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현명한 동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겠지만 그 동안 있어왔던 전쟁 속에서의 무분별한 민간인 학살이나 2차세계 대전에서의 홀로코스트를 되돌아 본다면 인간이 정말 다른 동물들 보다 이성적인 존재가 맞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진정 이 지구상에 인간만큼 자신의 종족을 많이 살해하는 종이 또 어디 있을까? 그토록 사납다고, 말하는 호랑이와 사자를 같은 곳에서 살게 한 사파리에서도 싸움을 통한 죽음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전쟁은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아이러니한 일 중 하나이다. 그리고 전쟁속의 인간들에게 이성이란 것은 어쩌면 본능에 의해 지워진 잊어버린 기억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보고나자 그러한 생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비록 영화이기는 했지만 마치 내가 20세기 초반으로 돌아간 것 같았고,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라는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사실 나는 실제로 예전에 들었던 교양과목 수업시간에 홀로코스트 관련 실제 사진들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함과, 충격에 할 말을 잃었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설치한 소각로, 독가스를 품어 대량 학살하는 샤워실, 유대인을 죽이기 전 뽑은 금니 등을 보며, 히틀러가 과연 사람이었는지 의심했다.
비록 이 영화가 그동안의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다르게 한 어린이의 시각에서 조금은 완곡한 표현으로 역사적 비극을 묘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잔인함은 퇴색되어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두 꼬마의 우정이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되었고, 피해자 중의 한 명이 바로 독일인이라는 사실이 이 영화는 유대인의 비극이 아닌 인류의 비극을 묘사한 것으로 보였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는 종종 반복된다고 말한다. 단적인 예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많은 사람들은 반성을 했고, 다시는 이런 야만적인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것은 1차 세계대전 보다 더 더욱 잔인하고, 지독했던 비극이었다. 이처럼 인간은 언제든 이성을 잃고 비극을 향해 치닫을 위험을 안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전 인류의 비극을 직시하고, 또 다시 이러한 비극이 발생되지 않도록 반성해야 한다. 더군다나 첨단과학으로 인해 대량살상무기가 많이 생산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이러한 인간의 자각은 더욱 더 절실하다. 피 땀 어린 많은 이들의 수고로움과 노력으로 탄생한 첨단과학이 인간을 죽이는 살상무기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현실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이제 우리 모두 반성하여 이 영화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