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유물(동래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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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부산의 유물(동래읍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序論
Ⅱ. 본론
1. 東萊의 歷史와 朝鮮 後期의 東萊
1) 東萊區의 沿革
2) 朝鮮 後期의 東萊
2. 東萊의 중심부를 감싸고 있는 東萊邑城
1) 東萊邑城의 歷史
2) 사료․유적을 통해 본 東萊邑城
3) 東萊邑城 內의 모습․구조와 현재의 상황
Ⅳ. 맺음말

본문내용

데 그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조선후기 동래 고을의 중심관아이자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동헌의 대문이었던 것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현재 아무런 연고도 없는 금강공원 입구에 세워져 지나치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동래독진대아문과 함께 당시 관아건축의 공간 개념을 전혀 느낄 수 없게 되어 아쉬움이 크다고 할 수 있다.
③군사와 외교의 중심, 동래독진대아문 부경역사연구소, 《부산, 역사향기를 찾아서》, 부산은행, 2005, pp 127~130.
동래부청사인 동헌의 앞이자 망미루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던 조선시대 전형적인 관아의 대문이다. 원래 동래는 군사의 지휘권이 慶尙左兵營 소속 慶州鎭管에 예속되어 있다가, 동래가 국방외교상 중요하다는 인식에 따라 1655년(효종 6)에 군사권의 위상이 승격 독립하여 동래독진이 되었다. 이렇게 높아진 위상을 나타내가 위해 편액을 만든 것이다.
이 대문은 동래부사 정량필이 1636년(인조 14)에 동헌의 주건물인 충신당을 건립할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대문을 세운 직후 독진대아문의 편액을 달았던 것 같다. 그 후 1700년(숙종 26)에 중수되었고, 이어 1870년(고종 7)에 동래부사 鄭顯德 재임시절 다시 중수된 바가 있었다. 현대로 내려오면서 건물이 노후하고 훼손이 심해지자 지난 1971년에 전면적으로 해체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독진대아문의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편액이 정면 양쪽에 걸려 있다. 양쪽 기둥에는 ‘鎭邊兵馬節制營’(변방을 수호하는 병마절제사의 군영)과 ‘交隣宴餉宣慰使’(대일외교 차원에서 사신을 접대하는 관청)라는 글이 쓰여 있다. ‘교린’이라는 의미는 이웃 일본과의 우호적 외교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다가 지붕은 솟을대문이며 처마는 홑처마 양식이다. 무고주의 3樑이고 두공은 초익공 양식이다. 이것 역시 망미루와 함께 역지로 옮겨가는 비운을 겪었다. 지금 금강공원의 숲속에 아무 의미 없이 홀로 있어 아쉽기만 하다. 원래 자리인 동래읍내로 가져와야 무화유산의 제 빛을 발휘할 것이다.
④장관청 부경역사연구소, 《부산, 역사향기를 찾아서》, 부산은행, 2005, pp 130~131.
동래부 소속 군사장관들의 집무소이며 속오군과 아병을 맡고 있던 武廳이다. 동래부사의 아래에 경찰과 군사업무를 맡은 군사 장교가 있었는데, 바로 將官, 軍官, 捕校들이다.
將官廳 건물은 1669년(현종 10)에 동래부사 鄭이 창건하였고, 이어 숙종 때 부사 魚震翼과 부사 趙世煥이 각각 중건하였는데, 1706년(숙종 32)에 부사 黃一夏가 지금의 위치에 옮겨 세웠다. 장관청이 들어서기 전 원래 이곳은 향청의 자리였는데 서로 바꾼 것이다.
현재 이 건물은 사단법인 東萊耆英會가 관리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조선후기 동래지역 武任들이 동래기영회 창립당시부터 관여해 왔던 내력과 관련이 있다. 동래기영회는 1846년 동래고을에 살던 노인명사들이 耆英契를 조직한 데서 출발하여 160년의 전통을 가진 기로회 단체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송공단동래의총去思壇關王廟永報壇의 향사를 하다가, 오늘날에는 문화사업장학사업사회사업 등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수안동에 기영회가 운영하는 문화회관이 있다.
⑤군관청 부경역사연구소, 《부산, 역사향기를 찾아서》, 부산은행, 2005, p 131.
軍官廳은 동래부 소속 군관들의 집무소이다. 이 건물은 장관청과 함께 조선시대 관아건축 가운데 무청으로서 희소가치가 크다. 조선시대 동래지방은 다른 고을과 달리 무청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원래의 위치는 동래시장 앞 신한은행 자리에 있었으나 주변이 도시화되면서 충렬사 뒷산의 현재 위치로 옮겨 놓았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숙종 때 세차례 중창되었다. 1982년에 해체하여 충렬사 뒤쪽으로 옮겨 세울 때 건물의 마루도리 밑에서 나온 상량문에 의하면, 1812년(순조 12)에 부사 趙貞喆이 증축한 것으로 되어 있다.
Ⅳ. 맺음말
조선 후기 부산의 동래가 국방의 요새지로서 등장하게 된 것은, 이 지방이 일본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일본군의 침입루트가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산지방의 동래에는 장차 또다시 있을지도 모를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많은 군사시설이 갖추어지고 경비태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그리고 삼포에 흩어져 있던 왜관이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과의 국교가 다시 열리면서부터 부산 한곳에만 설치되고, 왜사의 상경이 금지됨에 따라 일본과의 외교와 무역은 순전히 부산왜관에서만 이루어졌다. 따라서 부산에는 규모가 큰 왜관이 세워지고, 여기에는 다수의 왜인이 항상 머물고 있어 외교문제를 처리하고 무역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조선 후기의 동래부산지방은 군사적외교적인 측면에서 국내의 어느 지방보다도 국가적 관심이 계속 집중되어 이름난 고장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군사적 측면에서 동래를 알아 보았는데, 그 중 동래읍성은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읍성은 과거에도 존재한 것으로 보이나, 1731년(영조 7) 당시의 東萊府使 鄭彦燮이 과거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읍성을 쌓게 되었다. 이는 《朝鮮王朝實錄》, 《慶尙道續撰地理志》, <萊州築城碑>, 《東萊府築城謄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성곽의 규모와 당시 읍성 축조를 위해 동원된 인원 등을 나타내고 있다. 《朝鮮王朝實錄》에서는 동래에 대한 왜관군사적 방비 등 많은 기록들이 있으나, 동래읍성에 대한 기록은 앞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간접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성 안에는 객사동헌 등의 관사, 정원루연정 등의 누정, 향청교련청 등의 청사, 유포고대동고 등의 창고와 같이 여러 관청과 부속건물들이 있었고, 또 동래백성들의 민가들이 즐비하게 이어져 있었으며 많이 왕래하는 거리의 중심에 읍내장이 있었다.
이러한 동래읍성의 존재는 당시 동래부의 중심지 기능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측면에 있어서 많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東萊誌編纂委員會, 《東萊誌》, 世明出版社, 1983.
부경역사연구소, 《부산, 역사향기를 찾아서》, 부산은행, 2005.
부경역사연구소, 《시민을 위한 부산의 역사》, 선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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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10
  • 저작시기20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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