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한국 중세문학 조선시대문학의 배경
Ⅱ. 한국 중세문학 조선전기문학의 특성
1. 악장문학
1) 형식
2) 내용
3) 성격 및 의의
2. 경기체가
3. 가사
1) 형식
2) 내용
3) 의의
4) 작품개관
4. 시조
5. 소설
1) 형성 과정
2) 특징
3) 작품
Ⅲ. 한국 중세문학 조선후기문학의 특성
Ⅳ. 한국 중세문학 조선시대문학 시조
Ⅴ. 한국 중세문학 조선시대문학 소설
1. 형성
2. 특징
3. 소설의 종류
1) 영웅 소설
2) 가정 소설
3) 대하 소설(가문 소설)
4) 애정 소설(염정 소설)
5) 풍자 소설
6) 판소리계 소설
4. 소설의 유통 과정
Ⅵ. 한국 중세문학 조선시대문학 고소설
1. 고소설의 형성과정
2. 고소설의 양상
3. 조선조 지식인들의 소설관
4. 고소설의 향유양상과 독자층위
Ⅶ. 한국 중세문학 조선시대문학 가사
참고문헌
Ⅱ. 한국 중세문학 조선전기문학의 특성
1. 악장문학
1) 형식
2) 내용
3) 성격 및 의의
2. 경기체가
3. 가사
1) 형식
2) 내용
3) 의의
4) 작품개관
4. 시조
5. 소설
1) 형성 과정
2) 특징
3) 작품
Ⅲ. 한국 중세문학 조선후기문학의 특성
Ⅳ. 한국 중세문학 조선시대문학 시조
Ⅴ. 한국 중세문학 조선시대문학 소설
1. 형성
2. 특징
3. 소설의 종류
1) 영웅 소설
2) 가정 소설
3) 대하 소설(가문 소설)
4) 애정 소설(염정 소설)
5) 풍자 소설
6) 판소리계 소설
4. 소설의 유통 과정
Ⅵ. 한국 중세문학 조선시대문학 고소설
1. 고소설의 형성과정
2. 고소설의 양상
3. 조선조 지식인들의 소설관
4. 고소설의 향유양상과 독자층위
Ⅶ. 한국 중세문학 조선시대문학 가사
참고문헌
본문내용
또한 허균은 한글소설 뿐만 아니라 도인을 그린 <남궁선생전>, 신기한 의술을 펼치는 <장산인전>, 서울 거지이야기인 <장생전>, 허균이 문학적 스승인 손곡 이달을 표현한 <손곡산인전>, 세상으로부터 은둔한 채 인간의 본성을 실천한 <엄처사전> 등 체제 밖의 이단적 인물에 대한 관심을 형상화한 5편의 한문 단편소설도 창작하였다.
3. 조선조 지식인들의 소설관
소설(소설)은 경(경)과 사(사) 등 점잖은 전통적 유학적 글과는 대립되는 성질로 갖은 잡스러운 내용을 모았다는 의미에서 잡지(잡지)에 해당하는 글을 모두 포함한다.
중국에서 소설을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장자] 외물편인데, 그밖에도 반고의 [한서] 예문지와 어숙권의 [패관잡기] 등에서도 역시 길거리에 떠돌고 있는 이야기를 꾸며서 말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소설을 배격한 학자로는 조위, 이덕문, 이식, 유몽인 등이 있는데 주로 [논어] 술이편에서 공자가 말하였듯이 \'괴이하고 폭력적이며, 어지러운 허황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자불어 괴력난신)\'을 충실하게 따르려는 식자층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비사실적이며, 비도덕적인 내용에 따라 현실의 풍속과 기강을 문란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소설을 꺼렸던 것이다. 하지만 서거정, 홍만종, 양성지, 김만중, 이양오 등의 학자 경우는 소설 속에 참된 진리와 후대 거울로 삼을 만한 가치와 효용성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긍정적인 소설관을 피력하였다.
이처럼 대립되는 소설관 속에서 독자 계층은 점차 양반 사대부에서 부녀자로 확대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4. 고소설의 향유양상과 독자층위
소설은 언어인지 능력이 있는 문자해독층을 중심으로 향유되는 예술이자, 서적의 유통을 통해 접할 수 있는 관계로 어느 정도 경제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실제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종이는 매우 비싼 사치품으로 늘 재활용하여 사용하였다.
먼저 한문해독층으로서 양반 사대부와 중인 이상의 서리 계층의 남성들은 중구계 소설에 익숙한 분위기로 점차 중국소설의 번안, 번역, 개작 등의 형태로 우리 고소설의 본격시대를 조성하였다. 이에 한글창제 이후 한글 해독층이 점차 확산되면서 국문소설을 읽을 수 있는 독자층이 형성되었는데, 한글을 언문, 암클, 계집글로 낮추어 부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양반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와 중인 이하의 언문해독층이 국문소설의 주요 독자층을 이루었다. 다음으로 문자에 대한 문맹층을 위한 향유통로로 직업적 이야기꾼(전기수, 강담사)과 소설 낭독자(강독사)가 존재하였다. 주로 장터에 모인 평민이나 일부 기력이 쇠한 나이든 양반 사대부 집안에서 돈을 받고 직업적으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문맹층에게는 판소리라는 또 다른 향유통로가 있어 독특한 미적 체험을 보장해 주었다.
한편 소설에 대한 수요의 급증은 책을 빌려주는 세책업(세책업)을 번성하게 하였는데, 초기는 붓으로 직접 베껴 쓴 필사본(필사본)이 읽혀지다가, 대량생산과 대량보급의 인쇄시대를 열었다. 방각본(방각본)이 그것인데 주로 나무에 새기는 목판본이 주조를 이루었다. 가끔 임시변통이나 급할 때 보완책으로 토판(토판)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극히 드문 현상이다.
방각본은 서울(경판본), 전주(완판본), 안성(안성판본) 등 주요 상업도시를 중심으로 활발히 찍어 소설을 널리 보급하였다. 이런 형태의 소설 향유는 개화기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딱지본(구활자본, 혹은 육전소설이라고도 함) 시대로 이어졌다.
Ⅶ. 한국 중세문학 조선시대문학 가사
조선시대 시가사의 또 다른 한 축인 가사 역시 조선 후기 시가사의 폭과 층을 두텁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조선후기 가사는 사대부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향유계층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층위를 분류하기 어려울 만큼 다채롭다. 이 시기에는 특히 서민계층의 가사가 그들의 정서와 생활을 반영하면서 성행하였으며, 봉건적 질곡 아래 억압된 정서를 자유롭게 유출시키는 주정주의로의 경향을 뚜렷이 노정하고 있다. 이러한 주정주의는 봉건적 예교를 벗어던지고자 하는 시정인들의 감성 해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서민가사에는 또한 해체기를 살아가는 복잡한 인물군상과 세태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서사적 가사들이 또 하나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봉건적 농촌공동체가 무너지고 경제의 논리가 삶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그 부산물로 나타난 인간 군상의 부정적 면을 다룬 것도 있지만, 고단하고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긍정적인 인물들을 형상화한 작품도 적지 않다.
가사와 약간 다른 분야인 잡가는 대개 17세기 이후 여항의 유흥이 본격화되면서 등장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시 가사에 뚜렷이 부상하기는 19세기 중엽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잡가는 율격의 자유분방함, 의성어의태어의 자유로운 구사, 특별한 의미전달보다는 경쾌하고 활기찬 풍광의 묘사 등이 특징이다. 이러한 언어적 특질은 분명 당시 시정인들이 지녔던 감각의 세련성과 여유로움 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 미학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질이 도시서민층의 욕구에 부응하여 잡가는 19세기 말 이후 가장 두터운 대중을 확보한 노래 양식으로 떠오르게 된다. 즉 18세기 이래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사설시조가 19세기 이후 점차 쇠퇴하여 중엽 이후부터는 잡가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20세기 초에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잡가집’들은 바로 19세기 중엽부터 잡가가 누린 대중적 인기도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잡가는 진취적인 서민의식의 반영보다는 퇴폐적쾌락주의적 속성 때문에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고, 감각적피상적 속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참고문헌
* 김대용(1994), 조선초기교육의 사회사적 연구, 서울 : 한울아카데미
* 신차균(2006), 교육철학 및 교육사의 이해, 서울 : 학지사
* 이만규(1991), 조선교육사I, 서울 : 거름
* 이문원(2002), 조선 후기 실학교육사상의 현대적 조명, 한국교육사학
* 이성무(1995), 조선양반사회연구, 서울 : 일조각
* 장동표(1996),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서당에서 향교 서원까지, 청년사
3. 조선조 지식인들의 소설관
소설(소설)은 경(경)과 사(사) 등 점잖은 전통적 유학적 글과는 대립되는 성질로 갖은 잡스러운 내용을 모았다는 의미에서 잡지(잡지)에 해당하는 글을 모두 포함한다.
중국에서 소설을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장자] 외물편인데, 그밖에도 반고의 [한서] 예문지와 어숙권의 [패관잡기] 등에서도 역시 길거리에 떠돌고 있는 이야기를 꾸며서 말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소설을 배격한 학자로는 조위, 이덕문, 이식, 유몽인 등이 있는데 주로 [논어] 술이편에서 공자가 말하였듯이 \'괴이하고 폭력적이며, 어지러운 허황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자불어 괴력난신)\'을 충실하게 따르려는 식자층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비사실적이며, 비도덕적인 내용에 따라 현실의 풍속과 기강을 문란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소설을 꺼렸던 것이다. 하지만 서거정, 홍만종, 양성지, 김만중, 이양오 등의 학자 경우는 소설 속에 참된 진리와 후대 거울로 삼을 만한 가치와 효용성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긍정적인 소설관을 피력하였다.
이처럼 대립되는 소설관 속에서 독자 계층은 점차 양반 사대부에서 부녀자로 확대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4. 고소설의 향유양상과 독자층위
소설은 언어인지 능력이 있는 문자해독층을 중심으로 향유되는 예술이자, 서적의 유통을 통해 접할 수 있는 관계로 어느 정도 경제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실제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종이는 매우 비싼 사치품으로 늘 재활용하여 사용하였다.
먼저 한문해독층으로서 양반 사대부와 중인 이상의 서리 계층의 남성들은 중구계 소설에 익숙한 분위기로 점차 중국소설의 번안, 번역, 개작 등의 형태로 우리 고소설의 본격시대를 조성하였다. 이에 한글창제 이후 한글 해독층이 점차 확산되면서 국문소설을 읽을 수 있는 독자층이 형성되었는데, 한글을 언문, 암클, 계집글로 낮추어 부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양반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와 중인 이하의 언문해독층이 국문소설의 주요 독자층을 이루었다. 다음으로 문자에 대한 문맹층을 위한 향유통로로 직업적 이야기꾼(전기수, 강담사)과 소설 낭독자(강독사)가 존재하였다. 주로 장터에 모인 평민이나 일부 기력이 쇠한 나이든 양반 사대부 집안에서 돈을 받고 직업적으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문맹층에게는 판소리라는 또 다른 향유통로가 있어 독특한 미적 체험을 보장해 주었다.
한편 소설에 대한 수요의 급증은 책을 빌려주는 세책업(세책업)을 번성하게 하였는데, 초기는 붓으로 직접 베껴 쓴 필사본(필사본)이 읽혀지다가, 대량생산과 대량보급의 인쇄시대를 열었다. 방각본(방각본)이 그것인데 주로 나무에 새기는 목판본이 주조를 이루었다. 가끔 임시변통이나 급할 때 보완책으로 토판(토판)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극히 드문 현상이다.
방각본은 서울(경판본), 전주(완판본), 안성(안성판본) 등 주요 상업도시를 중심으로 활발히 찍어 소설을 널리 보급하였다. 이런 형태의 소설 향유는 개화기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딱지본(구활자본, 혹은 육전소설이라고도 함) 시대로 이어졌다.
Ⅶ. 한국 중세문학 조선시대문학 가사
조선시대 시가사의 또 다른 한 축인 가사 역시 조선 후기 시가사의 폭과 층을 두텁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조선후기 가사는 사대부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향유계층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층위를 분류하기 어려울 만큼 다채롭다. 이 시기에는 특히 서민계층의 가사가 그들의 정서와 생활을 반영하면서 성행하였으며, 봉건적 질곡 아래 억압된 정서를 자유롭게 유출시키는 주정주의로의 경향을 뚜렷이 노정하고 있다. 이러한 주정주의는 봉건적 예교를 벗어던지고자 하는 시정인들의 감성 해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서민가사에는 또한 해체기를 살아가는 복잡한 인물군상과 세태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서사적 가사들이 또 하나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봉건적 농촌공동체가 무너지고 경제의 논리가 삶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그 부산물로 나타난 인간 군상의 부정적 면을 다룬 것도 있지만, 고단하고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긍정적인 인물들을 형상화한 작품도 적지 않다.
가사와 약간 다른 분야인 잡가는 대개 17세기 이후 여항의 유흥이 본격화되면서 등장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시 가사에 뚜렷이 부상하기는 19세기 중엽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잡가는 율격의 자유분방함, 의성어의태어의 자유로운 구사, 특별한 의미전달보다는 경쾌하고 활기찬 풍광의 묘사 등이 특징이다. 이러한 언어적 특질은 분명 당시 시정인들이 지녔던 감각의 세련성과 여유로움 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 미학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질이 도시서민층의 욕구에 부응하여 잡가는 19세기 말 이후 가장 두터운 대중을 확보한 노래 양식으로 떠오르게 된다. 즉 18세기 이래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사설시조가 19세기 이후 점차 쇠퇴하여 중엽 이후부터는 잡가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20세기 초에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잡가집’들은 바로 19세기 중엽부터 잡가가 누린 대중적 인기도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잡가는 진취적인 서민의식의 반영보다는 퇴폐적쾌락주의적 속성 때문에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고, 감각적피상적 속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참고문헌
* 김대용(1994), 조선초기교육의 사회사적 연구, 서울 : 한울아카데미
* 신차균(2006), 교육철학 및 교육사의 이해, 서울 : 학지사
* 이만규(1991), 조선교육사I, 서울 : 거름
* 이문원(2002), 조선 후기 실학교육사상의 현대적 조명, 한국교육사학
* 이성무(1995), 조선양반사회연구, 서울 : 일조각
* 장동표(1996),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서당에서 향교 서원까지, 청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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