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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이념과 배경,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인간론과 수학적 예술론,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철학과 종교,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시간,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죄의 본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이념

Ⅱ.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배경

Ⅲ.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인간론

Ⅳ.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수학적 예술론

Ⅴ.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철학과 종교

Ⅵ.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시간

Ⅶ.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와 죄의 본질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 안정을 얻지 못하는 존재로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통전성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문제는 인간의 죽음과도 관계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기억한 과거는 점점 쌓이고 기대하는 미래는 점점 줄어들어 미래에 대한 기대는 송두리째 없어지고 만다고 하는데,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무상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는 인생의 모습은 산산이 조각나 있을 분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존재(Sein zum Tode), 잠깐이라도 정지해 있을 수 있는 순간도 갖지 못하고 있는 존재이다(하나님의 도성, XIII, 10). 왜냐하면 인간은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과거의 자신을 계속 상실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계속 죽어간다고까지 그는 말한다(Conf., I. vi, 7 \"Vitam mortalem an mortem vitalem). 여기서 우리는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은 무로 다시 되돌아가려는 경향성 때문에 항상 무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상기해 볼 수 있다. 무를 향해 있는 피조물의 모습은 이미 없는 과거로 항상 흘러가고 있는 시간성과 죽음에 직면해 있는 인간의 실존에서 더욱 명확히 나타난다. 그러면 이러한 시간 속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경험하고 있는 인간 실존의 문제 해결은 과연 무엇인가? 어거스틴은 결코 시간을 악한 것이라든가 혹은 시간으로부터의 도피가 인생문제의 해결이자 구원으로 보지 않으며, 시간을 단순한 정신 현상 혹은 환상으로 생각하여 그 실체성을 소홀히 취급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의 문제는 인간의 영적 생활과 그 의미를 추구한 종교적인 문제였다. 어거스틴이 시간의 본질을 이렇게 규명하고 이해한 이유는 무로 향해가고 있는 시간체험, 즉 무의 체험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 시간가 영원을 중재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비록 시간 속에서 무를 체험하며 살고 있다는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이 부정적인 무의 경험을 통해 불변하신 영원자에게 그의 마음의 지평을 열게 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시간론의 배후에는 영적 관심, 즉 영원한 하나님을 떠난 인간존재는 항상 불안한 것이므로 영원자에게 닻을 내려 그를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주제가 깔려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영원을 떠나서 시간을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Ⅶ.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와 죄의 본질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에 맞서 죄론을 전개하였다. 어거스틴은 자유가 인간의 본질적인 또는 근원적인 특성이라는 점에서는 펠라기우스나 철학일반과 일치한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도 그는 자유였다. 본디 인간의 자유란 선을 지향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 선이란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을 지향하는 한에서 인간은 자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하나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신을 향한 대신에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유한한 사물을 향할 수 있게 한다. 어거스틴의 눈에는 이러한 위험이 엄청난 것이어서 그는 ‘은혜의 도움의 힘’이라는 유명한 이론을 도입했던 것이다.
이것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주어졌다. 아담은 이 은혜의 도움에 의해서 언제나 의지를 신에게 향할 수 있었다. 은혜의 도움이란 이론은, 아담이 순수한 본성에 있어서는 신에게 향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전제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본성 그 자체도 선하지 않고 초자연적인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주장된다. 이러한 이유로 종교개혁자들은 어거스틴의 ‘은혜의 도움’이라는 이론을 반대하였다.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와 마찬가지로 창조와 인간본성에 대한 적극적긍정적인 평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인간본성에 부가된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상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어거스틴은 아담은 은혜의 도움으로 하여 타락하지 않고, 죽지 않고, 또 신에게 돌아서지 않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가 있었다.
어거스틴은 죄가 정신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 곧 우리가 서 있는 존재의 바탕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죄의 종교적 성격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죄는 도덕적 실패도 아니고, 또한 불복종도 아니다. 죄의 원인은 신이 우리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으로서의 신에게서, 곧 최고선으로서의 신에게서 돌아서는 데 있었다. 따라서 죄는 죄들이라는 복수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죄의 개념은 도덕주의적인 개념이 되고 말 것이다. 도덕적인 죄에는 도덕률이 적용될 뿐이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한 가지 치유법은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신의 도움을 얻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신의 도움은 실존의 조건 아래서는 상실되어 있다.
최고선에 돌아선 직접적인 결과는 이 최고선의 상실이다. 이 상실은 동시에 돌아선 죄에 대한 형벌이다. 여기에 비하면 다른 온갖 형벌은 전적으로 2차적인 것이다. 본래의 형벌이란, 존재론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은 존재의 힘인 것이기에 신의 상실은 힘의 상실을 의미한다.
아담의 죄는 잠재적으로 우리에게 유전되어 왔는데 그것은 아담의 생식력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죄인이 되었다. 원죄란 아담에게서나 모든 인간에게서나 본래 정신적인 죄였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죄이기도 하다. 죄는 우리의 숙명이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는 부정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 어느 만큼 강하게 죄책에 참여하느냐의 것인데, 어거스틴은 대답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 박일민(1987), Augustinus의 인간이해에 관한 연구, 중앙대, 박사
○ 어거스틴, 김광채 역(2004), 고백록, 서울 : 기독교 문서선교회
○ 원세호(1982), 죄의 원리와 보응, 국종출판사
○ 최상식(1975), Augustinus의 시간론에 대한 연구, 건대 석사
○ 하트만, 니콜라이, 강성위 역(1988), 철학의 흐름과 문제들, 서울 : 서광사
○ 鮮干學源(1966), 聖 어거스틴의 生涯와 政治 思想, 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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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5.03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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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74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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