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성리학)의 전파, 주자학(성리학)의 기본이념, 주자학(성리학)의 학파분화, 주자학(성리학)의 퇴계학파, 주자학(성리학)의 율곡학파, 주자학(성리학)의 퇴계율곡절충파, 주자학(성리학)과 예학 분석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주자학(성리학)의 전파, 주자학(성리학)의 기본이념, 주자학(성리학)의 학파분화, 주자학(성리학)의 퇴계학파, 주자학(성리학)의 율곡학파, 주자학(성리학)의 퇴계율곡절충파, 주자학(성리학)과 예학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주자학(성리학)의 전파

Ⅱ. 주자학(성리학)의 기본이념

Ⅲ. 주자학(성리학)의 학파분화

Ⅳ. 주자학(성리학)의 퇴계학파

Ⅴ. 주자학(성리학)의 율곡학파

Ⅵ. 주자학(성리학)의 퇴계율곡절충파

Ⅶ. 주자학(성리학)과 예학

참고문헌

본문내용

을 대표로 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남계의 이기관계에 대한 견해를 보면 그는 太極動以生陽을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태극이 실지로 음양을 생한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형화가 그런 것인데 다만 음양이 동정하고 태극은 그 주가 된다는 것이다....만약이 구절때문에 호발의 설과 같다고 한다면 아마도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일 것이다.”
남계는 주자가 태극은 동정한다고 말한 것은 태극이 만물의 근본이 되는 것임을 말한 것이지 실지로 발하여 현상화 된다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여 율곡의 설을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사단칠정론에서는 율곡처럼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여 사칠이 혼륜한 것으로 보지 않고 혼륜한 면도 있고 나누어지는 면도 있다고 하여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수용하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개 사단이 발함에 반드시 기에 탄다 하더라도 바로 인의예지의 순수한 이로부터 나온 까닭에 이를 주로 하니 이지발이라 한다. 그것은 사람의 본연지성이 비록 기질지성 중에 있다 하더라도 단지 그 주된 바를 지칭하여 본연지성이라 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남계는 기발, 기질지성으로 사단칠정을 말해야 하지만 사단은 본질적으로 이의 성격을 가지므로 이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취하여 퇴계의 호발설이 율곡의 해석처럼 이발과 기발을 별개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적용에 따르는 문제라고 해석하여 퇴계의 설과 율곡의 설을 조화 일치시키고 있다.
Ⅶ. 주자학(성리학)과 예학
17세기 사상계는 초반부터 주자 중심의 성리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상조류들이 촉진되었다. 나아가 이 시기는 성리학의 의리명분적 측면과 사회경제적 측면에 관심을 두어 왕실의 전례문제와 북벌론, 그리고 사회경제정책을 둘러싸고 각 정치세력 사이에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벌였다. 광해군 대 북인정권은 임란의 사회경제적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들은 당시 사회경제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 북인의 사상은 성리학의 의리명분론에 크게 구애받고 있지 않으며 서경덕, 조식의 사상과 양명학, 노장사상 등을 수용하였다. 이후 북인정권은 인심을 잃으며 반정의 명분을 제공했고, 결국 인조반정으로 이이학파의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북인들은 정치적으로 축출 당하고 그들이 수용한 사상 또한 배척당하였다.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이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경덕, 조식의 사상과 양명학, 노장사상 등이 영향력을 아주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리학적 의리명분론에 입각한 대명의리론의 강화는 병자호란을 불러일으키고 조선은 이적인 청에게 무릎을 꿇지만 격렬한 주화, 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말엽부터 서인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오히려 척화론과 대명의리론이 대세를 잡았다.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으며 두 차례의 예송을 비롯해 많은 전례논쟁들이 벌어졌다. 이미 15세기말부터 사림들에 의해 삼대의 예에 의한 교화가 강조되기 시작하고 중종 대에 들어오면 기묘사림에 의해 전례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어 16세기 중반 「주자가례」중심의 생활규범서인 제례서가 출현하고 동시에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7세기에 들어와서도 예는 양란으로 인해 해이해진 예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예치가 바로 그것이다. 예가 치국의 방도로 대두하면서 예학연구가 심화되고 각 학파 예학의 차이가 전례논쟁을 통해 표출되었다. 예송에서 이이학파의 서인은 「주자가례」와 「의례」 등을 강조하며 신권의 입장에서 왕사동례를 주장하였다. 반면 서경덕, 조식학파의 학문을 계승한 근기남인은 「주례」와 「예기」 등을 강조하며 왕권의 입장에서 왕사부동례를 주장하였다. 결국 예송은 근본적으로는 17세기 사회에서 각 학파 내지 붕당들이 나름대로의 학문적 기반 위에서 자신들의 노선의 정당성을 주장한 전형적인 \'정치형태로서의 전례논쟁\'이었다. 나아가 예송의 사상적 차이는 중세 사회체제에 대한 관점차이로 연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송은 조선후기 사회체제가 변화해 가는 상황에서 반드시 겪어야만 했던 하나의 과정이었다. 인조대의 사회경제정책 논의는 크게 적극적 개혁론과 소극적 개혁론으로 나눌 수 있다. 대체로 서인공신, 관료와 북인관료들은 대동법의 즉각 시행과 병농일치적 군제개혁, 상공업 장려에 의한 국가 재정 증대 등 적극적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반면 서인산림과 영남남인은 대동법과 호패법의 즉각 시행에 반대하고 화폐유통과 염철의 국가관장에도 반대하는 등 소극적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소극적 개혁론이 주류를 이루어 민의 삶의 향상, 국가재정 확보, 국방강화 등에서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효종 전반가지 서인관료들은 주로 대동법과 화폐유통의 시행을, 서인산림들은 대동법의 시행을 유보하고 공안(貢案) 개정을 선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현종 대에 가면 서인산림들이 서인관료와 북인관료의 적극적 개혁론을 수용하면서 당시 사회경제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어 2차 예송으로 근기남인이 권력을 장악하자 적극적인 개혁론자였던 윤휴가 호포론 등을 주장하면서 사회경제정책을 둘러싼 논의는 격렬해졌다. 서인도 호포론을 주장하였으나 이는 신분제 유지를 전제로 한 것으로 윤휴의 호포론과는 차이가 있었으며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숙종 초반 활발하였던 호포제 등 양역변통의 대변통론(大變通論)은 1694년 갑술환국 이후 소론이 주도하는 숙종 중반에 가면 군제를 개편하는 등 양역제의 모순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소변통론(小變通論)으로 바뀌어갔다. 이후 결국 영조 대 균역법으로 귀결되었다.
참고문헌
○ 김호태, 헌법의 눈으로 퇴계를 보다
○ 김풍기(1998), 율곡 이이의 문학론 연구, 고려대 석사
○ 예문동양사상 연구원·윤사순 공저(2002), 퇴계 이황, 예문서원
○ 장숙필(1992), 율곡 이이의 성학연구, 고대민족문화연구소
○ 정대환(1992), 조선조 성리학 연구, 강원대학교 출판부
○ 황의동(2001), 송준길의 성리학 연구, 새한철학회 23, 새한철학회

키워드

주자학,   성리학,   퇴계,   율곡,   예학
  • 가격6,5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11.05.04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7435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