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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집현전][천문학][한글][훈민정음][세종대왕 관련 시사점]세종대왕의 약력, 세종대왕의 성격, 세종대왕과 집현전, 세종대왕과 천문학, 세종대왕과 한글, 세종대왕과 훈민정음, 세종대왕 관련 시사점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세종대왕의 약력

Ⅲ. 세종대왕의 성격

Ⅳ. 세종대왕과 집현전

Ⅴ. 세종대왕과 천문학
1. 혼천의
2. 해시계
3. 물시계
4. 측우기

Ⅵ. 세종대왕과 한글

Ⅶ. 세종대왕과 훈민정음

Ⅷ. 결론 및 시사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 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4. 측우기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 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 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 상 관측 장비였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 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Ⅵ. 세종대왕과 한글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얘기가 있었지만 그 독보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한글은 창제자와 창제시기가 뚜렷한 역사적 사건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글자이다.
한글의 모음은 철학적 통찰에 의해, 자음은 과학적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다. 우주를 이루고 있다고 믿어지는 세 가지 요소인 하늘, 땅, 사람이 어우러진 것이 모음이고, 입 모양을 관찰한 음성학적 연구의 결과가 자음이다.
한글의 실제 창제자가 세종인지, 아니면 세종의 후원을 받은 집현전 학사들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군왕이 백성이 쓸 수 있는 글을 창제하기로 마음먹게 된 동기 역시 선구적이다. 한글창제의 동기는 그 유명한 훈민정음 서문에 간결하게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말은 중국 글(한자)과 서로 맞지 않다”는 자주 정신, “그래서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기 때문에 글자를 만들었다.” 는 민주적인 의식은 당시로서는 무척 진보적인 것이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우리의 새 글자를 만들어 반포하였을 때에 그 이름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그 뜻인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다. 이 말에는 특히 세종대왕의 민주(民主)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제 군주(專制 君主)는 백성을 우매한 상태에 남겨두고 독재(獨裁)를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것은 백성의 지식수준이 높아지면 나라의 정치를 비판(批判)하고 반항(反抗)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세종 임금은 그와는 정반대로 백성을 가르쳐서 글자 그대로 \"문민정치(文民政治)\"를 하겠다는 뜻을 가졌던 것이다. 세종 임금은 백성들이 글을 깨우치고 그것을 통하여 교양(敎養)과 지식을 쌓고 문화적 소양(素養)을 닦아서 스스로 나라의 일에 협력하고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한글을 창제했다. 이 얼마나 갸륵하고 뛰어난 정치 철학인가? 500여 년 전에 이미 현대의 민주 정치 사상을 글자 그대로 실현한 것이 세종대왕의 큰 뜻이었음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Ⅶ. 세종대왕과 훈민정음
1446년(세종 28) 창제된 훈민정음예의본과 훈민정음해례본.
국보 제70호. 목판본. 2권 2책.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에는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한 《훈민정음예의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전자에 관해서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月印釋譜)》 첫 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널리 알려졌으나, 후자에 대하여는 1940년 발견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의 형체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있었으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밝혀졌다. 후자는 예의(例義)해례(解例)정인지 서문 등 3부분 33장으로 되었는데,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고, 해례는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집필하였다. 정인지가 대표로 쓴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으로 발간일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되었다.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가(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그의 선조 이천(李狀) 이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이 발견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에는 김태준(金台俊)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 되어 있었던 것을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용준은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Ⅷ. 결론 및 시사점
세종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기반 위에 그를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인물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 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백기복, 대왕 세종, 2007
◎ 박영규,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들녘출판사, 2002
◎ 이한우,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 2007
◎ 이한우,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해냄, 2006
◎ 이성무, 조선왕조사, 동방미디어, 1998
◎ 전경일, 세종의 코드를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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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5.12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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